우유에게 보내는 편지(1): 크리스마스 날에 우유에게 보내는 편지

우유에게,

메리 크리스마스! 어제밤에 엄마가 보내준 사진을 보았다. 해마다 이모가 정성들여 만드는 로스트비프하고 엄마가 장만하는 치킨으로 우리집 성탄절 식탁은 푸짐하지. 디저트로 사온 케잌도 맛있게 보이더라. 그런데 네가 감기기운이 있어서 많이 못먹었다며? 몸조리 잘해라. 아빠도 사실 감기기운이  있어서 언니랑 나가서 외식을 하려던 걸 취소하고 집에 누워있었단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푹자서 그런지 흐르던 콧물도 멈춘 것 같애. 오늘 하루 잘 쉬면 내일부턴 괜찮아 질 것도 같구나.  
수험공부하느라고 얼마나 고생이 많니? 이제 몇달 안남았으니 조금만 더 고생해라. 밤에 잠못자고 늦게까지 책상에 앉아있으려니 힘들지? 시간이 지나가면 효율도 떨어지니까 너무 늦게 자지마. 잠잘 때 성장호르몬인 멜라토닌이 나와서 한참 클 시기에 밤잠이 부족하면 키가 안자란다는 말이 있단다. 낭설이길 바라지만 은근히 신경이 쓰이는구나. 한국에 오면 중학교 시험은 없지만 워낙 경쟁이 심해서 그 이상 공부를 한다고 하더라. 슬렁슬렁 학교를 다니고 놀거 다 놀면서 그럭저럭 대학까지 마친 아빠세대 사람들이 보면 모두들 가엾기 그지 없다. 

우유야, 
네가 요새는 물론 시간도 없겠지만, 아마 돌아오는 봄에 중학생이 되어서도 지금 내가 쓴 이 글을 술술 읽기는 쉽지않을거야. 우리말은 잘해도 한글을 읽기가 쉽지 않겠지만 틈틈히 읽기 연습을 하면 좋겠다. 말을 잘하는만큼 빨리 익숙해 질거라 믿는다. 그래도 초등학교 들어가기전에 두어달 와있으면서 한글을 혼자 깨쳐서 뜨문뜨문 읽을 수 있게된 건 정말로 대견한 일이다. 언니는 그때 너만 할 때 한글을 아예 몰랐으니까. 

위의 사진은 네가 여섯살때 한국에 들어와 몇달 지내면서 한글에 관심을 가질 때 언니한테 쓴 편지란다. 아래는 초등학교 3학년 방학때 들어와 아빠한테 선물준 거하고, 내 전화번호를 메모한 쪽지 사진이다. 혹시 그럴 일은 없겠지만 롯데월드 이런데 갔다가 언니나 아줌마 잃어버리면 나한테 전화하라고 그랬더니 네가 주머니에서 꺼내 보여주었지. 지금도 네가 보고 싶을 땐 가끔씩 이 메모를 보고 미소짓곤 한단다. 

너만 할때 한글을 하나도 몰랐던 언니가 이제 한국에서 대학졸업을 눈앞에 두고 있으니 그것도 기특한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남들은 못나가서 난리인데 왜 외국에서 나서 자란 사람을 한국으로 데려와 대학을 보내려고 하냐'고 할 때 아빠는 그냥 아무런 이유없이 한국에서도 교육을 받았으면 하는 단순한 생각에 언니를 들어오라고 했지. 처음엔 언니가 걱정이 태산같았던 모양인데 서서히 적응을 해가더니 언젠가 '아빠, 한국에 오길 잘한 거 같애. 고마워요.'라고 말해서 내가 도리어 너무나 고마웠단다. 

장래 진로나 취업도 고려하라는 충고같은게 귀에 잘 안들어 온 건, 현실에 잘 적응하지 못하셨던 할아버지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탓인 것 같애. 하긴 엄마도 그건 마찬가지야. 우리 부부 모두 이상을 좇는 성격이 현실에 적응하는 재능보다 앞선 것 같다고 생각한다. 하기야 엄마가 그랬으니 아빠하고 결혼을 했겠지. 엄마는 나의 꿈과 이상을 좇는 모습이 그럴듯 해보여서 거기에 속은 것도 같다. 걱정마 다 잘될 거야, 라는 한마디를 믿고 살다가 혹시 잘 안되면 어떻게하지 걱정을 하기 시작한게 결혼한지 이십수년이 지난 최근이라고 하니 엄마도 참 대단한 사람같아. 하지만 걱정하지 말아라. 다 잘 될테니. 믿어준 엄마를 말년에 고생시킬 수야 없지않겠니. 네가 아주 늦둥이로 이세상에 나온 것도 우리 부부에게는 참으로 큰 복인데, 거기엔 잘 키우려면 열심히 노력하라는 계시도 있다고 믿으니 하늘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네가 다른 친구들에 비해서 엄마 아빠 나이가 너무 많다는게 미안할 때가 많은데, 그만큼 더 잘해줄테니 이해해 주렴.   

아빠는 어제 일어나니 목이 쌔하고 오후부터 콧물이 나고 머리가 아프고 그래서 자리에 누워있었단다. 원래는 언니하고 이태리요리 먹으러 가기로 했었지. 이브라고. 그런데 언니가 '무리해서 나갈 것 없어요. 외식도 몸상태가 좋아서 맛있게 먹을 수 있을때 하는게 좋지. 뭐 드시고 싶어요?'라고 물어주었단다. 착한 언니지? 갑자기 두부조림이 먹고 싶었고, 얼큰한 김치찌개가 먹고 싶었어. 그리고 아빠의 컴퍼트푸드 스팸 몇조각도. 언니가 다 만들어주었어. 거기에 더해서 양배추가 있다고 콜슬로도 만들고 계란말이도 해주어서 맛있게 먹었단다. 그래도 크리스마스 이븐데 하고 캰티클라시코를 한병 열어서 둘이 맛있게 마셨어. 술 한잔하고 푹자서 그런건지 조금전에 일어나보니 한결 몸이 나아진 것도 같구나. 너도 오늘 푹 쉴 수 있으면 좋겠는데, 학원가야 하니? 빨리 컨디션이 회복되길 바란다. 디저트로는 동네 빵집에서 사온 딸기 타르트하고 파운드케잌 한조각을 먹었단다. 파운드케잌도 스팸처럼 아빠한테는 컴퍼트푸드인 것 같다. 어른이 되어서 알게된 마들렌, 피난시에를 유난히 밝히는 것도 아마 파운드케잌이 연상되는 맛이라 그런 것 같다고 여기고 있지.  


우유야,

네가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다면 그게 언제일까? 그게 언제가 될지 모르는 지금으로선 참 궁금하기만 할 따름이다. 아빠가 밥과술이라는 이름으로 블로그를 시작한게 2009년 12월이니 벌써 7년이 되었다. 처음엔 엄마도 모르고 언니도 몰랐는데 몇년이 지나고 꼬리가 밟히고 말았단다. 처음엔 남들과 소통하기 위한 블로그였는데, 작년부터는 나 자신을 위한 기록으로도 의미가 있겠다 싶어서 이런 저런 글을 올리고 있단다. 세월이 흐르면 잊혀질 풍물에 대한 우리세대의 추억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은 마음도 있어서 '나으 음식일기'라는 제목으로 쓰는 것도 그 가운데 하나지. 

이제 너를 위해서도 글을 쓰려고 한다. 아니, 정확하게는 너를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둘째 딸이 커서 언젠가 아빠가 이렇게 살았구나 하는 걸 조금이나마 알아주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진 나를 위해서 쓰는 거야. 그리고 서글픈 현실인데 너와의 많은 기억은 일상을 벗어난 날들이 많은 것 같애. 운동회, 학예회, 가족 여행, 명절, 제사 이런 날들 말이다. 평범하게 지내는 나날을 함께 하지 못한게 새삼 가슴에 저려온다. 물론 엄마한테도 너무나 미안하고. 

앞으로는 여기에다가 너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많이 쓸거야. 소소한 일상도 적고, 맛있는거 먹은 이야기, 여행다닌 이야기 같은거 말이야. 나는 올해 참 많이도 다녔다. 저 멀리 핀란드에 가서 이런저런 청어요리도 먹어보고. 러시아 쌍페테르부르그에 가서는 에르미따쥬 박물관에서 평소부터 보고 싶어했던 많은 그림을 보기도 했지. 터키 이스탄불에 가서는 고등어 샌드위치도 맛있게 먹었어. 터키는 정말로 맛있는 음식이 많더라. 이런 이야기들을 엄마 언니한테는 여행도중에 간간히 카톡으로 사진을 보내기도 하고, 갔다와서 잠깐씩 들려주기도 한 것도 같은데, 너는 공부에 방해될까봐 얘기를 안한 것 같애. 이젠 여기에 써놓을테니 아무때나 읽을수가 있겠지.  

열심히 한글공부해서 그 아무때나가 빨리 왔으면 좋겠구나. 지난주까지만 해도 제법 오랜기간 중남미 여러나라를 다니며 그나라 음식도 먹고, 구경도 하고 그랬는데 무엇보다도 만난 이들한테서 그곳 사람사는 이야기를 들은게 좋았단다. 너에게 보여주고 싶은 곳도 많았고,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도 많았어. 너도 이제 몇달 있으면 중학생이 될텐데 교복을 입으면 제법 숙녀티가 나겠지? 자식을 잘 키워야 할 책임을 진 부모로서 네가 빨리 커서 어른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지만, 한편으로 늘 귀엽고 어린 딸의 모습으로 남아 있었으면 하는 비현실적인 마음도 조금 남아있는 건 아무래도 인간이란게 합리적이지만은 않은 존재이기 때문이겠지. 


이 사진 생각나니? 네가 초등학교 입학하기 몇달전에 하와이 갔을 때 네 뒷모습이야. 사실 그 때 여행갈 형편은 아니었는데 아빠 아는 분이 좋은 콘도를 내주셔서 어찌어찌 좀 무리를 해서 가게되었지. 지나고 보니 갔다오길 참 잘한 것 같애. 그 때 생각나? 엄마는 일이 있어서 같이 못떠나고 하루 늦게 와서 합류를 하였지. 그 때 첫날 하루가 참 길고도 지루했었던 것 같애. 콘도에서 내려다 보이는 와이키키 해변도 멋있고 바닷가에 나가 물에 발도 살짝 담가보고 했는데 괜히 모든게 쓸쓸하게 보인다고 했지? 우리끼리 나가서 가까운데서 로코모코를 먹었던가?


그러다가 다음날 공항에 마중나가 엄마 만나니까 너무나 반가웠지. 단 하루였는데 우리 모두 아주 오랫동안 떨어졌다 상봉한 가족처럼 반가워했지. 지금 돌이켜보니 그런 경험도 좋았던 것 같애. 아빠는 그전에 일로 하와이에 몇달동안 머물렀던 적이 있어서 그 동네를 조금 안다면 아는 편인데, 첫날 공항에서 렌터카 픽업해서 숙소로 가는 길에 네가 몇번이고 '아빠 길 잘 알아?' 하고 물으면서 역력히 불안해 하는 모습도 귀여웠어. 다음날 엄마 픽업해서 곧바로 내가 잘가던 차이나타운 베트남 국수집으로 갔지. 모두들 맛있게 먹어서 나도 참 기분이 좋았단다. 그리고 저녁에는 알라모아나에 있는 스테이크집에 가서 고기도 먹었고. 포터하우스 컷이 듬직했었어. 


우유야,

빨리 감기 나아서 씩씩한 모습으로 돌아오길 바란다. 너에게 쓰는 글이라 생각하니 자판을 두드리는 손이 못따라 갈 정도로 이야기가 마구 앞서가는구나. 쓰는 나도 즐겁고. 오늘은 여기까지야. 나도 이제 밥먹고 약먹고 또 쉬어야 겠다. 보고 싶어. 사랑해. 


덧글

  • Korna 2016/12/25 14:12 # 삭제 답글

    아빠의 사랑이 물씬 느껴지는 글이네요!

    저도 일찍 유학오고 일찍 결혼해서 그런지 저희 아빠도 밥과 술님 같은 마음일 거라 느껴졌어요

    따님이 꼭 이 글을 읽을 날이 오면 좋겠네요

    메리 크리스마스 하시고 감기도 빨리 쾌차하세요~
  • 밥과술 2017/01/05 17:55 #

    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감기는 다 나았습니다.

    앞으로도 자주 들러 덧글 남겨주세요~
  • remedios 2016/12/26 18:55 # 답글

    새해 복 많이 받으셔요^^
  • 밥과술 2017/01/05 17:55 #

    감사합니다. remedios님도 새해 복많이 받으시구요~
  • 역사관심 2016/12/31 08:05 # 답글

    새해에도 좋은 글과 맛있는 소식 많이 전해주세요~. 해피 2017!
  • 밥과술 2017/01/05 17:57 #

    역사관심님도 새해 복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건강하시구요~
  • 迪倫 2017/01/02 16:01 # 답글

    오늘 큰애가 학교로 다시 돌아가고 난 다음 다시 이 글을 읽으니 마음이 위로가 된다고 할지 울컥한다고 할지 그렇습니다. 밥과술님, 가족들 모두 건강하고 행복한 2017년 되시기 바랍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밥과술 2017/01/05 17:58 #

    적륜님도 새해복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댁내 평안하시고 늘 웃음이 넘치시길 기원합니다!!
  • sunho 2017/02/13 07:37 # 답글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쌓이고 쌓인 편지들 신나게 읽어내려갈 우유를 응원합니다. 근사한 편지들 쓰고 또 서주시길, 제게 보내는 것도 아닌 편지를 계속해서 읽을 수 있기도 함께 바라봅니다. 글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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