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으 음식일기(21): 누룽지먹고 숭늉마시고... 나의 반백년 음식일기


누룽지. 이세상에는 많은 물건이나 발명들이 원래 의도와는 달리 쓰이게 되면서 더욱 진가를 발휘하게 된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원래는 협심증 치료 목적으로 개발되었다가 엉뚱한 부작용이 생기는 바람에 도리어 발기부전치료제로 각광을 받게된 비아그라도 그런 경우다. 믿거나말거나 한국에서는 고산병치료제로 사용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세월이 하수상하니 누룽지를 먹고싶어 글을 몇자 적으려니 갑자기 비아그라가 머리속에 툭 튀어나와 자리를 잡는다. 태반 그래도 주사, 신데렐라 그래도 주사, 엉뚱하게 연상이 되어 주사가 떠오르니 어찌할 도리가 없다. 역시 주사파가 나라를 잡으니 크게는 국정에서 작게는 개개인의 두뇌까지 농단을 당하는 모양이다. 정신차리고 누룽지 이야기로 돌아가야지. 

한달 정도 나가있는 동안에 맛있는 누룽지가 너무 먹고 싶었다. 한식은 안먹어도 별로 생각이 나지 않았지만 문득문득 누룽지가 그리웠다. 그런데 막상 돌아와서도 누룽지는 먹을 방법이 없었다. 참는 수 밖에. 

누룽지란 원래는 밥을 제대로 지으면 생기는게 아니다. 너무 화력이 세거나 해서 밥이 타서 바닥에 눌어붙어 생기는게 누룽지다. 말하자면 원래 지어야 할 밥에서 로스가 생겨난 부분인거다. 공업화 시대의 기준으로 따지자면 밥의 불량품에 해당하는게 누룽지인 것이다. 정확하게 온도가 제어가 되는 전기밥솥이 보급되면서 모든 가정에서 누룽지는 사라져 버렸다. 그걸로 해피엔딩이어야 했다. 

그런데 그걸로 끝이 아닌게, 뭔가 아쉬워서 누룽지를 찾는 사람들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식당에서는 누룽지로 숭늉을 만들기 위해, 심지어는 누룽지를 따로 메뉴에 넣기 위해 누룽지를 전문업체에서 사다가 쓴다고 했다. 국경넘어 남의 나라에서 싼값에 대량으로 만들어진 누룽지는 위생상태가 좋지않네, 국내에서 만드는 것도 원료가 되는 밥이 좀 수상한데가 많네, 이런저런 말들이 많았다.

일인당 하나씩 가져다 주는 돌솥밥을 사용하는 한정식집을 비롯한 몇몇 식당에서는 밥을 덜고 뜨거운 물을 부어 누룽지가 넉넉히 들어간 숭늉을 먹을 수가 있기는 했다. 그런데 이게 다 옛날의 누룽지 문화와는 거리가 있었다. 일본에서도 우리와 사정은 다르지 않은듯 누룽지에 대한 향수를 잊지못하는 고객층을 위하여 누룽지가 생기는 기능이 추가된 전기밥솥 제품이 나오기도 했다.

위의 그림은 시골 부엌의 모습이다. 구글검색으로 내가 어린 시절 기억하고 있는 시골집의 부엌과 그나마 유사한 형태를 한 사진을 찾아 앱으로 가공을 한 것이다. 시골에 내려가면 모든 집이 비슷한 부엌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큰 살림을 하던 할아버지댁은 남의 집보다 가마솥이 컸지만 형태는 다른 집들과 유사했다. 강원도 우리 고향만 그랬는지 다른 곳은 어떻게 불렀는지 모르겠는데 시골에 내려가면 부엌을 '정지'라고 부르는게 신기했다. 정지 옆으로 광이 붙어있어 먹을 거리를 갈무리하기도 했다. 우리 집은 제사가 많아서였는지 술을 자주 담갔는데 광에는 늘 발효중인 술항아리들이 있어 들어가면 달착지근하고 때로는 시큼하기도 한 술냄새가 배어 있었다. 

장작불을 때어 가마솥에 밥을 지으면 누룽지가 많이 나오는 날은 꽤 커다랗게 나왔다. 다같이 밥을 먹기 전에 밥을 하는 누나나 아주머니로부터 따끈따끈한 누룽지 뭉치를 받아먹는 건 별미였다. 일부분을 걷어내어 부엌에 들어선 내게 주고 솥에 남은 누룽지에는 물을 부어서 숭늉을 끓였다. 그날 그날 식구수에 맞추어 일정량의 밥을 지었을 것이다. 밥이 타서 누룽지가 많이 생긴 날은 그만큼 밥이 줄은 걸 의미했다. 그러면 여자들은 모자란 밥대신 끓인 누룽지를 먹었던 것 같다. 



시골에서 밥을 짓는 도구가 가마솥이었으면 서울의 각가정에서는 위와 같은 밥솥을 사용하였다. 이건 전기밥솥이 보급되기 전까지 사용되던 물건이었다. 이게 바닥이 두껍고 뚜껑의 압력으로 맛있게 밥이 지어지는 모양이었다. 자취생이나 문간방에 세를 들어 취사도구마저 마땅찮던 사람들은 양은냄비라 불리던 알미늄 냄비에 밥을 지어 먹기도 했는데 화력조절이 어려워 맛있게 밥을 짓기가 쉽지 않았던 것 같다. 당시에 '냄비밥을 먹는다'는 말은 모두가 가난하던 시절, 더욱 가난한 살림을 일컫는 표현이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서울에서 위의 밥솥에 밥을 해도 누룽지가 생기기는 마찬가지였다. 밥을 어쩌다 태우면 누룽지가 새카맣게 눌어붙고 그 내음이 위로 올라와서 밥에서도 탄내가 났다. 밥을 잘못지으면 밑에는 탄 밥, 가운데는 그럭저럭 된 밥, 위에는 설익은 밥, 이렇게 되기도 했는데 이걸 3층밥이라고 불렀다. 어느 가정이고 밥짓기에 실패한 날이 가끔씩 있었다.  

누룽지는 노릇노릇하게 색깔이 나고 고소한 냄새가 풍기는게 제일 알맞은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요즘 이야기하는 마이야르 반응이 어쩌고 이런거는 몰라도 상관이 없었다. 그저 경험상 노릇노릇한 빛깔의 누룽지가 바닥에 생기면 흰 밥도 윤기가 돌고 찰기가 생겨 최적의 상태의 밥이 지어진다는 걸 당시의 주부들은 누구나 알았던게 아니었나 생각해 본다.

누룽지에 물을 붓고 끓이면 시간에 따라 푹퍼져서 죽에 가까운 모습의 누룽지음식이 생기기도 하고, 뜨거운 물을 부어서 누룽지의 딱딱한 입자가 불어서 씹기에 부드러울 정도로만 퍼진 것도 있고 했는데 어른들은 푹 퍼진 것을, 아이들은 덜 부드러운 걸 선호하였다. 일반론이기는 하지만, 어려서는 고두밥을 좋아하다가 나이를 먹어가며 진 밥을 선호하게 되는 것과 맥을 같이 하는게 아닌가 싶다.  

일본에 머물렀거나 여행을 한 경험이 있는 분들은 알아봤을 수도 있는데, 시골의 가마솥이 우리나라 전통의 취사도구 였다면 위의 사진은 오카마(お釜)라고 불리는 일본의 그것이다. 지금도 일본에서는 위의 모습을 앙증맞게 줄여놓은 밥솥에 일인분씩 밥을 지어 내어놓는 식당이 있다. 여담인데 일본말로 여장남자나 여성스러운 남자를 오카마라고 하는데 이 밥솥하고 동음어이다. 그래서 이런 남자들하고 편하게 지내는 여자를 오코게(おこげ)라고 한단다. 누룽지가 일본말로 오코게(お焦げ)인데 밥솥에 들러붙어있다는 뜻에서 왔다고 한다.

중국말로는 누룽지를 궈바(锅巴)라고 한다. 지금은 중국에서도 마찬가지로 누룽지가 많이 사라졌다. 간식거리로 먹던 누룽지에 대한 향수를 적은 글이 검색해보면 많이 나온다. 쌀밥뿐이 아니라 콩, 옥수수, 기장으로 지은 밥의 누룽지에 대한 이야기도 있는데 먹어보지 않아서 상상이 가지 않는다. 쌀로 밥을 해먹는 문화라면 어느 곳에서나 누룽지가, 아니면 누룽지 비슷한 것이 생길텐데 한국, 중국, 일본 말고는 겪어본 바가 없어서 호기심이 풀리지 않은채 아쉬워 할 뿐이다.  

우리나라 이야기로 돌아와, 한 때 식당 카운터에 계산을 마치고 디저트삼아 가져가라고 놓아둔 사탕그릇에 유행처럼 '누룽지맛'사탕이 놓여있던 적이 있었는데 아마도 밥먹고 누룽지 숭늉을 마시던 향수에 부합해서 그랬던 것 같다. 이제는 전기밥솥이 보급되고 한 세대가 넘게 흘렀고, 그래서 누룽지에 대한 향수를 지닌 사람은 매우 줄었지 싶다. 돌아와서 누룽지는 아직 못먹었다. 으슬으슬 감기기운이 도는 것 같으니 더욱 그립다. 성탄절 선물로 산타할아버지가 맛있는 누룽지라도 한뭉치 가져다 주었으면.  
 


덧글

  • 지나가다 2016/12/25 11:22 # 삭제 답글

    따뜻하고 촉촉한 누룽지는
    정줄 놓고 먹다보면
    밥 몇 공기 분량을 해치울 수 있게 해주죠 ㅎㅎㅎ;;;

    감기 조심하세요~~~
  • 밥과술 2017/01/05 17:52 #

    정말입니다. 누룽지는 먹어도 먹어도 계속 들어갑니다. 누룽지 끓여서 밥을 살짝 더넣고 말아먹어도 별미입니다.
  • Semilla 2016/12/25 13:22 # 답글

    전 생각해보면 누룽지를 먹어본 적이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다지 누룽지에 대한 그리움도 없고 숭늉도 별로 그렇게 그립지 않은가봐요. 누룽지맛 사탕은 좋아했는데. 언젠가 한인가게에서 누룽지라고 과자처럼 포장된 걸 파는 걸 보고 신기해서 산 적이 있는데 그 뒤로 까맣게 잊어버려서 유통기한이 지나 버린 적도 있네요;;
    그런데 제 남편 포함 돌솥비빔밥 좋아하는 미국사람들 중에 돌솥에 눌어붙은 밥을 유독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는거 보면 뭔가 눌은밥이 특별한 데가 있나 싶기도 해요. 전에 제가 집에서 만들려고 뚝배기 샀다니까 그걸로 밥을 그렇게 만들 수 있냐면서 정색을 하고 묻던 친구도 있었거든요.
  • 밥과술 2017/01/05 17:53 #

    눌은 밥은 특별한 맛이 나긴 합니다. 고소하고 향기롭지요. 솥에서 갓 긁어낸 누룽지는 말랑말랑한데 그걸 그냥먹어도 맛있고 기름 발라 돌돌 뭉쳐먹어도 고소합니다.
  • 찬별 2016/12/26 05:52 # 답글

    요즘 냄비로 종종 밥을 지어먹는데, 바닥이 두꺼워서 그런지, 삼층밥을 일부러 지으려고 해도 그렇게 잘 안되더군요. 쌀이 좋아져서 그런가 싶기도 하고...
  • 밥과술 2017/01/05 17:54 #

    냄비밥은 확실히 누룽지가 금방 생기는데, 가마솥에서 만들어진 누룽지보다 맛이 덜한 것 같습니다. 확실히 누룽지가 그리워지는 계절입니다. 먹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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