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란이 없으니 모든게 다 귀찮아졌다 밥과술네 집이야기


계란이 이렇게 중요한 거였구나 새삼 놀라고 달걀의 위대함과 또 내인생에서 달걀이 차지하는 비중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 일을 며칠전에 겪었습니다. 우선 짚고 넘어갈 것이 닭이 낳은 알이라고 해서 닭의알, 그게 부드럽게 달걀이 된게 우리말인데 평소에 계란이라는 단어를 더 많이 쓰는 것 같습니다. 왜그런가 입을 벌려 발음을 해보았더니 달걀은 입을 크게 두번 벌려야 하고 계란은 입을 적당히 벌린채 혀만 놀려도 발음이 되니까 편의상 그런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은 그냥 계란으로 통일하겠습니다.

며칠전 저녁이었습니다. 외부에서 약속이 없이 집에 일찍 퇴근을 하였습니다(일찍이라야 8시지만). 늘 밖에서 저녁을 먹어야하는 경우가 많은 저는 어쩌다 집에서 저녁을 먹게 되면 은근히 기분이 좋습니다. 그래서 무얼 해먹을까 이런저런 상상을 하며 집에 도착하였습니다. 평상복으로 옷을 갈아입고 간단히 씻고 거실의 에어콘에 스위치를 넣으니 조금전까지 짜증스럽던 푹푹찌는 폭염이 언제적 이야기더냐 남의 일 같았습니다. 사람이 이렇게 간사한 겁니다. 아무튼 그래서 흥겨운 마음으로 주방 냉장고를 연 것 까지는 좋았는데 아니 글쎄 계란이 떨어진 것 아니겠습니까? 

저는 망연자실하여 패닉에 빠져버렸습니다. 냉정하자, 이성을 찾자, 이 난국을 어떻게 타개할 것인가 궁리를 해보려고 거실소파로 돌아와 앉았습니다. 제가 퇴근길에 상상한 메뉴는 모두 계란을 필요로 하는 것들 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들어오는 길에 필요한 걸 사가지고 오는 일은 있어도, 일단 집에 들어오면 지산지소, 집에 있는 걸 사용하여 끼니를 만든다를 나름의 원칙으로 정하고 있었거든요. 더구나 씻고 옷까지 갈아입은 판에 뭔가를 사러 이 찌는 더위에 다시 나간다는 건 자존심이 허락을 하지 않았습니다. 

먼저 머리속에서 그리던 저녁메뉴의 후보는 이렇습니다. 매콤한 비빔국수 아니면 남은 된장찌개와 나물을 넣은 비빔밥. 그게 아니면 라면을 끓여서 찬밥 한숫갈 혹은 볶음밥. 모두 아주 심플하고 소박한 메뉴입니다. 그런데 이게 모두 계란을 피해갈 수가 없는 것들 입니다.


위의 사진처럼 삶은 계란이 들어가지 않은 비빔국수는 상상하기 힘듭니다. 반 개도 아니고 꼭 한 개를 넣어서 밖에서 반 개를 넣은 냉면이나 비빔국수를 먹으며 맺힌 한을 집에서 푸는 밥과술이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비빔밥도 '본시 비빔밥이란게...' 하면서 양반찾는 분들은 계란을 넣지 않는게 정통이라고 하지요. 그건 그거대로 좋습니다. 저는 들기름이나 참기름으로 반숙으로 부쳐서 넣지를 않으면 직성이 안풀립니다. 오며가며 먹는 비행기 기내식 비빔밥에 계란후라이가 들어있지 않은 아쉬움을 집에서 풀어야 하니까요.


라면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라면에 떡도 넣고 만두도 넣고 찬밥도 넣고, 또 때에 따라 양파도 좀 썰어넣고 당근도 넣을 때가 있고, 그때 그때 기분과 상황에 따라 이런저런 걸 넣어 끓이는데 반드시 라면말고 있어야 하는게 파, 계란, 김치입니다. 지난 수십년간 봉지 라면을 끓이며 파와 계란을 넣지않은 적이 한번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없으면 끓이기를 포기했으니까요. 진짬뽕, 짜파게티 이런걸 끓이면 계란이 없어도 되겠지만 집에는 계란이 들어가야 하는 라면밖에 없습니다. 


보온밥통에 들어있는 뜨거운 밥보다 냉동실에 얼려둔 찬밥이 더 쌀밥의 숨겨진 맛을 발휘할 수도 있는 경우가 볶음밥인데 이것도 파와 계란이 없으면 아예 그 존재가 성립할 수 없는 메뉴지요. 중국에서 셰프를 뽑을 때 딴차오판(蛋炒飯), 그러니까 계란볶음밥을 만들어보게 하는 경우가 왕왕있다고 합니다. 주재료는 밥하고 계란, 파만 가지고 만드는 겁니다. 그만큼 볶음밥의 주역인데 냉장고에 없으니 진작에 탈락입니다.

일단 생각했던 메뉴가 모조리 무너지고 마니까 약간 허탈해 집니다. 그래서 에이, 햄버거나 배달시켜 먹을까 잠시 생각을 했는데 이것도 패스입니다. 두뇌라는게 참 묘하게 어깃장을 놓는지라 평소에는 그냥 치즈버거 시켜서 잘도 먹었건만 갑자기 와퍼를 시켜서 버터로 계란을 부쳐서 케찹이랑 넣어먹었던게 생각이 나고, 거기에 꼽히고 나니 계란이 없는 평범한 버거는 가라, 이런 모드가 됩니다. 


이렇게 버터를 넉넉하게 녹여 부드럽게 부친 반숙후라이는 샌드위치에도 너무 잘어울립니다. 집에 빵도 있고, 햄도 있고, 양파도 있고, 치즈도 있는데 계란이 없어서 밥과술표 샌드위치도 후보탈락이라는 고배를 마시고 맙니다.


그냥 있는 반찬 이것저것 꺼내어 백반처럼 차려먹을까 생각을 했지만 구운 김도 있고 스팸, 소시지도 있고 또 나물 김치도 있는데 일단 계란결핍신호를 전달받은 대뇌세포는 이런 걸 생각해내어 애간장을 태웁니다. 계란말이.. 아니면 후라이 또는 찜이 없으니 백반설계는 취소합니다.  


그러고 보니 평소에 얼마나 계란을 많이 먹고 살았나 되짚어 보게 되고, 배는 고파오는데 계란에 대한 그리움은 사무쳐만 갑니다.


얼마전에 쥬스가 만들어주었던 하이라이스도 드미그라소스와 적당히 익은 부드러운 계란의 조화가 어울리는게 그 매력이지요. 


커피여사가 맛있게 만들어준 김밥도 계란이 없으면 완성도가 확 떨어졌을 것 입니다. 


우유에게 만들어주어서 늘 칭찬을 받는 오무라이스에서 생명은 계란입니다.  스크램블드 에그처럼 해서 새롭게 만들어 본 오무라이스가 생각이 나서 사진을 찾아보니 계란에 대한 집착은 더해만 갑니다. 


사실 카레는 계란이 없어도 맛있는 메뉴입니다. 만, 기왕지사 이렇게 된 것, 이판사판, 금상첨화, 설상가상 뭔지는 모르겠는데 사고회로는 카레에 까지 계란 넣어서 맛있게 먹었던 사실을 꺼집어 내어 위장을 약올립니다. 



심지어는 언젠가 술먹으러 갔을 때 안주라고 내어온 이런 엽기적인 음식까지 생각이 납니다. 그래, 그 때 이걸 싫어했던 사람이 아무도 없었지... 계란은 위대한 거야. 

그러고보니 숱한 케잌과 과자 심지어 요즘 유행하는 마카롱까지 계란이 들어가지 않은 게 뭘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영화 잉글리시 페이션트에서 줄리엣비노슈가 어렵게 구한 계란 한개를 땅에 떨어뜨려 깨고는 줏어담다 엉엉 울던 대목이 생각납니다. 그래, 당신 마음을 너무나 잘알겠소.  그 때  그대목에서 웃었던 걸 용서해주오. 함께 펑펑 울었어야 했는데. 

결국 계란의 위대함을 깨닫고 고마움을 모르고 살았던 나날을 반성하며 모든 걸 포기하고 맥주만 연신 마시다 잠이 들어버렸다는 슬픈 이야기를 마칩니다. 맨 위의 사진은 다음날 편의점에서 사다놓은 계란입니다. 앞으로 계란이 떨어지는 일은 다시 없도록 하리라 마음 먹었던 날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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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2016/08/02 20:53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밥과술 2016/08/06 23:53 #

    네 맞습니다. 계란과 스팸입니다~
  • 英君 2016/08/02 21:08 # 답글

    계란은 참 맛있지요. 저도 계란이 집에 없으면 허전해서 안절부절해요.. ^-^;;
    밥과술 님의 계란 그리움이 진하게 묻어나는, 맛깔나는 글과 사진,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밥과술 2016/08/06 23:58 #

    전 그날 허전함을 넘어서 거의 패닉상태였습니다...계란은 맛과 효용에 비해 가격도 쌉니다. 그래서 계란을 일본에서는 '物価の優等生'라고 하지요. 전후 가장 오르지않은 품목이라고 합니다. 위대하신 계란느님!!

    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애교J 2016/08/02 21:39 # 답글

    1인 가정인데도 한판씩 사다 먹다가 요즘같은 날씨에 상온보관했더니 지독한 썩은내가 나더라구요. 달걀에서 나는 냄새는 아니길 빌었지만ㅜㅜ 상온보관이 더 좋다지만 여름엔 냉장고의 힘을 빌려야겠어요!
  • 밥과술 2016/08/07 00:00 #

    아이구, 상온보관이라니요. 상온보관이 좋은 식품도 있지만 잘 모를때는 그냥 냉장고에 넣는게 안전하지요. 옛날같이 바람잘통하는 가옥구조에서 서늘한 곳에 보관하면 모를까 요새같은 아파트에선 더욱 그렇습니다. 더구나 이제 한반도는 아열대...
  • 고양이씨 2016/08/02 21:53 # 답글

    계란 정말 중요해요.. 라면에도 볶음밥에도 비빔면에도 냉면에도... 떡볶이에도...라멘에도... 없어선 안될.. ㅜㅠ
  • 밥과술 2016/08/07 00:05 #

    그럼요. 그렇구 말구요. 단독으로도 훌륭하고요. 후라이, 찜, 말이, 삶은계란... 아, 날로 흰밥에 넣고 간장 조금 떨구고 비벼먹는 것도...
  • 2016/08/02 23:08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밥과술 2016/08/07 00:12 #

    출장은 잘 다녀오셨나요? 한국은 무척 덥다고 합니다. 저도 매우 더운곳에 있어서 고국에 계신 분들께 좀 덜 미안하기는 합니다만...

    간장계란밥. 좋~지요! 계란이 싱싱하고 맛있다는 전제하에 말이죠.
  • 듀얼콜렉터 2016/08/03 01:05 # 답글

    확실히 뭔가에 필이 꽂혀서 그걸 먹어야 하는데 못 먹으면 왠지 모를 집요함이 생기면서 다른 음식들은 먹고 싶지도 않는 상태가 있죠 ㅎㅎㅎ 전 계란을 크게 안 좋아하는지라 저런 상황까지는 가지 않을것 같지만 그래도 고생하셨습니다 ^^;
  • 밥과술 2016/08/07 00:14 #

    그죠? 한번 꽂히면 못벗어 납니다요. 먹는 것 뿐만 아닙니다. 중고교때 시험기간에 시험끝나고 영화봐야지 하다가 내내 그영화 생각만 하다가 결국은 시험전에 영화를 보고 공부도 못해서 시험은 폭망... 이런 적이 여러번 있었습니다 ㅠㅠ
  • 백꽝 2016/08/03 02:26 # 삭제 답글

    블로그나 이글루 등등이 사실은 아마추어(?) 저널리즘 아닙니까....
    정말 글 잘 쓰시... 아니 거의 프로 저널리즘 수준 입니다.
    그리고 내용에 대해서는
    공감!
    동감!
    공감!!!
    비슷한 경험 여러번 있음다...
  • 밥과술 2016/08/07 00:15 #

    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공감해주시니 또 고맙구요. 자주 들러주세요~
  • 떡잎 2016/08/03 08:55 # 답글

    하하. 밥과술님 이 일기 너무 재밌어요!
    저도 계란 좋아하는 걸로는 어디가도 빠지지 않는다고 자부해 왔는데, 와퍼에 계란 후라이라니 한 수 단단히 배워갑니다. ㅋㅋ
  • 밥과술 2016/08/07 00:23 #

    재밌게 읽어주셨다니 꾸벅!

    와퍼에 계란후라이는 저작권이 제게 있지 않습니다. 저도 직장동료에게 전해 듣고서 해봤더니 정말 새로운 맛이 열리더군요. 지금은 없어졌는데 일본 유명 햄버거체인 ファーストキッチン의 인기메뉴가 베이컨에그버거, 치즈베이커에그버거 등 계란이 들어간 것이었지요. 맥도날드나 와퍼 배달시키면 한번 해보세요~
  • Erato1901 2016/08/03 17:23 # 답글

    부럽습니다. 저는 돈걱정 안하고 저렇게 스팸이랑 계란 맘껏 먹어보는 것이 저의 원이죠...
  • 밥과술 2016/08/07 00:24 #

    집에서 해먹은거 아닙니다. 밖에서 누가 사준겁니다.
  • Semilla 2016/08/03 20:08 # 답글

    저는 계란이 12개씩 들은 것이 익숙한데 10개 들은 곽(?)이 신기하네요. 저희 집도 계란 참 많이 먹습니다. 일주일에 두 다스는 사서 한 다스는 삶은 계란처럼 쪄놔서 아무 때나 출출하면 먹거나 샐러드에 슬라이스해서 얹어 먹지요. 남은 한 다스는 베이킹하거나 요리해 먹는데 두 다스가 모자랄 때도 종종 있네요. 계란후라이가 토핑이 있는 햄버거집 가면 꼭 넣어먹고, 아침 식사로 베이컨을 구우면 응당 그 기름에 스크램블을 해먹지요. 라면 먹던 시절에 꼭 넣어먹었는데, 이거 라면 국물이라도 만들어서 계란 넣어 먹고 싶어지네요. 저탄수화물식을 하면서 계란에 대한 의존도가 확 올라간 것 같습니다. 오늘 저녁은 스팸이랑 계란을 부쳐먹을까 싶네요.
  • 밥과술 2016/08/07 00:32 #

    와, 참 다양하게 많이 드시네요. 써주신 덧글을 보니 이런저런 계란요리가 다 먹고싶어졌습니다. 계란 포스팅 한번 더해야 겠습니다.

    사시는 곳에는 비싼 달걀 싼 달걀 골라서 살 수가 있나요? 저는 계란이 너무 싸져서 질적으로 저하된게 좀 불만입니다. 좀 비싸더라도 좋은 걸 귀하게 먹는게 좋은데 말이죠.
  • Semilla 2016/08/07 03:06 #

    네 저는 가게에 가면 cage free로 사는데 가장 신선하고 비싸면서 맛있는 건 토요일에 파머스 마켓 가서 근처 농부들에게서 사는 거예요. 비싼 계란일수록 껍질이 단단해서 깨뜨리기 어렵더군요...
  • puchiko 2016/08/04 11:28 # 삭제 답글

    ㅋㅋㅋ 그래서 저녁은 어떻게 해결하셨는지 궁금하네요 ㅋㅋ
    혹시 나가서 계란 사오신건가요?????
  • 밥과술 2016/08/07 00:26 #

    위에 쓴대로 주린배를 움켜쥐고 쓰러져 잤습니다.
  • Mirabell 2016/08/05 16:48 # 답글

    계란은 가난뱅이에게 값싸면서도 휼륭한 단백질 보충과식감의 즐거움을 주는 매우 훌륭한 식자재이지요.. 항시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챙기는게 이 계란인데... 냉장고에 대체 가능한(?) 무언가가 많으셨나봅니다 -_-; 8월 말까지 학원에 다닌다고 경비를 아끼려고 매일 도시락을 싸가는데 항시 빠지지 않는데 쌀밥 위에 계란후라이... 볶은김치와 두 녀석은 기본 도시락 반찬으로 그만이라 생각하고 있지요.. ㅋㅋ 주말에 약간의 시간이 나신다면 계란을 삶아서 마요네즈와 다진피클 약간의 후추 다진게맛살 등을 넣으셔서 계란샌드위치를 만들어서 드셔보는것도 좋으실듯.. 물론 에어컨 바람 안에서 한정이지만... --);
  • 밥과술 2016/08/07 00:31 #

    냉장고에는 이것저것 먹을게 많기는 합니다. 냉동실도 한번씩 시간을 잡아서 이것저것 다 꺼내어 해먹어야 하는데...

    계란후라이에 김치볶음, 이 두개만 있어도 아주 훌륭한 도시락이 되지요. 제가 왜 계란샌드위치가 먹고 싶어졌나 했더니 며칠전에 본 미라벨님의 덧글이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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