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으 음식일기(7): 집에서 식빵을 굽다 나의 반백년 음식일기


처음으로 우리집에서 빵을 구워내던 날의 기억은 지금도 너무나 선명하다. 휴일이었을 거다. 집에 형도 있었고 누나도 있었으니까. 집에 빵틀이 생겼다. 우리는 둘러앉아 빵틀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신기하게 여겼다. 어머니 아버지 어느 분이 가져오신 건지는 기억에 없다. 당시의 아버지는 누구나 그랬지만 우리 아버지는 특히나 살림에 아무런 관심이 없으셨다. 집을 사고파는 것, 자식들의 진학 등도 살림으로 간주하셨는지 다 어머니에게 일임하셨다.  

그렇다면 빵을 굽는 오븐은 어디서 그냥 생겼던, 돈을 주고 샀던 당연히 어머니가 가져오신 거라고 추측하는게 맞을 터인데, 어머니 아버지 어느 분이 가져오신 건지 모르겠다고 한데에는 이유가 있다. 그날 빵을 구울 때 아버지가 함께 현장에 계셨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할아버지 내림으로 손재주가 좋으셔서 목공일을 잘하셨던 것 같다. 몇번 안되긴 하지만 문짝을 수리한다거나 선반을 매거나 하시는 걸 본 기억이 있다. 하지만 먹는 것과 관련해서는 제삿날 젯상에 올릴 생밤을 치는 것 말고는 과일도 잘 안깎으셨던 같다. 

그러니 빵틀 앞에서 아버지가 어머니를 도와 오븐을 들여다보시고 잘 익은 빵을 꺼내고 하시던 모습이 인상깊지 않을 리가 없다. 위의 그림은 기억속에 남아있는 오븐을 그려본 것이다. 아무리 검색을 하여보아도 당시의 가정용 제빵기 사진은 찾을 수가 없었다. 이게 사실은 이것 저것 할 수 있는 오븐인데 빵굽는 것 말고는 달리 이용할 요리가 없었으므로 그냥 빵틀로 불렀던 것 아닌가 싶다. 위에 그린 것처럼 연탄불 위에 얹어 열을 얻는 구조였다. 밑둥은 불기운이 들어갈 구멍이 뚫려있었는데 뭔가 조금 복잡한 구조였던 것 같다. 몇년 지나 미국의 우주 로케트가 불을 뿜는 걸 과학영화에서 처음보고 빵틀 밑둥하고 비슷하다고 느낀 적이 있다. 대충 희미한 기억을 더듬자면 위에 그린 것과 비슷하지 않나 싶다. 뒷쪽으로 연통이 나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다.

나는 처음 이 오븐을 대했을 때 전혀 다른 생각을 품었다. 영화에서 본 테레비젼하고 똑 같은 모습이 아닌가. 이게 테레비젼이면 얼마나 좋을까 몇번이나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어머니는 이스트라는 걸 미지근한 물에 풀고 밀가루 반죽을 했다. 듣도보도 못한 물건이 빵을 만드는데는 꼭 필요한 거라니 신기했다. 어머니는 옆에서 지켜보던 내게 먹어볼래? 하시고는 조금 입에 떠넣어주셨다. 밍밍하고 살짝 느끼한 듯도 하고 별 맛이 없었다. 나중에 빵만들기가 몇 번 반복되어서야 이스트를 따뜻하게 푼데서 나오는 냄새를 좋아하게 되었다. 금방 뚝딱하고 빵이 나오는 줄 알았더니 반죽을 마치고나서 몇시간 기다려야 한단다. 참을성없는 어린아이에게 이게 얼마나 지루하고 긴 시간인가. 조바심을 내며 저녁을 먹고나니 어머니가 잘 부풀어 오른 반죽을 보여주셨다. 떼어낸 반죽을 동글동글하게 찐빵처럼 빚어서 버터를 바른 틀안에 세개씩 넣었다. 버터인지 마가린이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빵이 익기를 기다리는 사이 전기가 나갔다. 그 당시는 정전이 워낙 흔해서 방마다 양초가 구비되어 있었고 전기가 나가면 그러려니하고 금세 성냥을 켜서 촛불을 밝혔다. 그래도 서울은 스물네시간 전기가 들어왔고 시골 속초는 저녁에만 그것도 읍내에만 몇시간, 그리고 대부분의 지역은 호롱불 신세를 면하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시골에 내려갔을 때 내가 머물던 할아버지 방에는 남포라고 불리는, 호야(유리커버)를 씌운 등유램프가 있었고 다른 방은 모두 어두침침한 호롱불이었다. 

아무튼 어머니와 아버지는 각자 한손에 촛불을 들고 뒤란 연탄불(화덕이라 불렀다)위에 빵틀을 얹은 곳으로 나가셨고 나는 졸졸 따라가 구경을 하였다. 유리를 통해 몇번 들여다 보기도 하고 뚜껑을 열고 확인도 하셨던 것 같다. 얼마나 지났을까 드디어 오븐을 내려서 아버지가 빵을 꺼내셨다. 

지금도 못잊는다. 그 때의 향긋한 내음을. 고소한 빵이 두덩어리(세덩어리였는지도 모르겠다)나 완성되었다. 틀에서 빠져나온 빵은 빵가게에서 파는 그것과 똑 같았다. 이런게 집에서도 가능하다니! 나는 감격에 겨웠다. 전기는 들어오지 않았고 우리는 빵을 먹지않고 그냥 잤던 것 같다. 다음날 일어나보니 갈색으로 잘 익은 빵이 정말 먹음직스러웠다. 

그리고나서 집에서 가끔씩 빵만들기는 3년이상 계속 되었던 것 같았다. 후생주택에서 더 큰 집으로 이사를 가서도 심심찮게 만들어 먹었는데 거기서 3년정도 살다가 집을 줄여 이사를 가면서 우리집의 가내제빵사는 막을 내리게 된다. 어머니는 탈지분유도 섞어서 빵을 만들기도 하셨다. 나는 정작 빵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 많이 먹지는 않았지만 우리집 빵이 맛이 좋았던 건 기억한다. 자랑삼아 학교에 가지고가서 아이들을 나누어주면 좋아라고 먹었다. 부드러운 식감에다 고소한 맛의 식빵은 까칠까칠하고 딱딱한 옥수수 식빵에 물려있던 아이들 입맛에는 딱 맞았을 터였다.

그랬다. 당시는 학교에서 급식으로 옥수수빵이 나왔다. 처음에는 가난하여 도시락을 못싸오는 아이들에게 주는 용도였는데 도시락을 못싸오는 아이들보다 배분되는 빵의 양이 넘치자 남는 건 매일 청소당번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 옥수수빵이라는게 그 원료가 아마도 미국의 원조물자였을 것이다. 아래는 검색에서 찾은 사진인데 이것보다는 작았다. 아무튼 옥수수가루의 거친 입자가 입안에서 거슬렸고 맛도 별로였다. 어쩌다 집에 가져가면 맛이 고소하다며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훗날 미국에서 남부를 여행할 때 바베큐집을 들려서 콘브레드 그러니까 옥수수빵을 먹어볼 기회가 있었다. 특히 흑인들이 하는 바베큐집의 콘브레드는 정말 맛이 좋았다. 그리고 옛날에 먹었던 급식빵과 비슷한 맛을 찾아내고는 이렇게 맛있는 걸 왜 싫어했지? 하고 자문했었다. 물론 비슷한 식감과 맛이어서 반가웠을 뿐 완성도의 수준은 달랐겠지. 하지만 그 이후로 나는 콘브레드를 잘하는 바베큐식당을 찾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옛날 무시했던 처사를 반성하는 의미에서 맛있는 콘브레드느님을 정중히 영접하곤 한다.  

이 옥수수가루는 미국의 원조물자여서 민간가정에도 어떤 루트를 통해서 배급이 되었는지 우리 집에서 먹은 기억은 없는데 앞집 청자누나네는 늘 이 옥수수 빵을 해먹었던 기억이 있다. 빵이 아니라 프라이팬에 그냥 쪘다고 하는게 옳은 표현일 것이다. 대략 아래와 같은 비주얼이었는데 물론 어린 나의 입맛에는 맞을리가 없었다. 

당시 정부는 모자라는 쌀공급을 대신하여 값싼 밀가루를 보급하려고 애써서 빵만들기도 장려하고 그랬고, 그 영향이 우리집에 생긴 오븐으로 연결되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기사를 검색하여 보니 YWCA같은 부녀단체를 통하여 식빵만들기 무료강습회도 열고 그랬다는, 아래와 같은 기사도 있었다. 오븐 가격은 600원에서 900원 정도라고 하여 같은 시기 다른 물가를 찾아보았다. 개봉관 영화가 70원, 짜장면이 20원이다. 이 숫자를 고려해보면 요새 감각으로 8만원에서 15만원 정도의 가격이 아니었을까 한다.

아래 기사는 밀가루 음식을 장려하기 위하여 이를 실천한 이를 소개하는 내용이다. 제목은 "쌀대신 밀가루로. 처음엔 허기지지만 습관되면 든든해져" 이다. 요즈음 젊은이들에게는 오히려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는 내용이어서 간단히 소개해 본다. "... 가나안촌이라는 이상농장을 만들어놓고 4년동안을 꼬박 분식으로만 살아온 김용기(53)씨는 밀가루를 주식으로 살아온 경험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처음엔 뱃속이 허전하기 짝이 없었다. 뱃속이 꽉차지 않으니 가루음식은 쌀밥에 비해 그저 허전하기만 했다. 먹은둥만둥 한것이 빵이었다.' 그러나 이런 생활이 두달째 접어들자 빵의 참맛을 차차 느끼게 되었다... (중략)...그래서 김씨는 서슴지않고 이렇게 말한다. '쌀밥으로 배를 꽉채워야한다는 우리의 생리는 없어져야 한다'고." 

밀가루는 쌀을 못먹어서 먹는 대용식량이라는 이미지가 강하던 시절이었다. 빵은 가정에서 만들기가 수월치않으니 널리 보급되지 않았고, 가정집에서는 반죽을 굴대로 굴리고 썰어서 칼국수를 해먹거나, 적당히 뜯어서 수제비로 먹었고, 밀가루를 묽게 풀어서 김치나 파같은 걸 넣어서 간단하게 적을 부쳐먹었다. 요새는 파전 김치전 그러는데 그 때는 주로 적이라 불렀다.

이러한 연유로 빈곤의 상징같았던 밀가루에 그 이미지를 덧칠한 음식이 있었으니 바로 풀빵이었다. 그리고 반대로 이 모든 이미지를 한방에 날려버릴 밀가루 혁명이 그 뒤로 다가오고 있었으니 바로 라면의 등장이 그것이다. 풀빵이야기와 라면이야기는 다음 포스팅에 이어서 해야겠다.  


나으 음식일기(6): 겨울철 군것질의 4대천왕 나의 반백년 음식일기

버스정거장마다 리어커 행상들이 늘어서서 먹을 것을 팔았다. 지금은 배터리도 흔하고 소형발전기도 있어서 밤이 되면 길거리 행상들도 환하게 밝히고 장사를 하지만 옛날에는 어두워지면 모두 카바이드 등불을 키고 팔았다. 카바이드등이라는게 돌덩어리같이 생긴 화학물질을 물에다 넣으면 뽀글뽀글 거품이 올라왔고 그걸 모아서 불을 붙이는 단순한 것이었다. 그 근처에 가면 그다지 유쾌하지못한 독특한 냄새가 났다. 리어커 행상들은 봄 여름이면 철따라 딸기도 팔고 참외 수박도 팔았는데 이런 품목들은 시장의 과일가게나 동네 구멍가게에서도 파는 것들이어서 행상 특유의 정취와는 약간 거리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역시 행상하면 떠오르는게 겨울에 많이 팔던 군것질거리다.

군것질이라고 하면 아이들이 사먹는 것만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어른들도 즐겨먹는 것들이 포함되었다. 삼시 세때 밥먹는 것 이외에 먹는건 다 군것질이라고 불렀다. 정시에 먹는 식사도 칼로리가 요즘보다 훨씬 떨어졌을테고 내용도 부실했을 터이니 군것질, 군입질이라 불리는 간식거리는 누구나 기회만 되면 다들 맛있게 먹었던 것 같다. 그래서였는지 그 때 사람들은 누구네 집에 갈 때면 없는 살림에도 빈 손으로 가는 경우가 적었던 것 같다. 지난번 포스팅에 잠깐 이야기 했듯이 전병, 강정 이런 과자종류를 사가거나 아니면 과일 같은 걸 사갔다. 

태극당 고려당 이런데서 파는 카스테라, 케잌 같은 건 부자집 아니면 제 돈내고 못사먹는 귀한 음식이었다. 학부형이 선생님 댁에, 회사 부하가 상사집에 갈 때 큰맘먹고 가져가는 선물의 대표품목이었으니 약간의 '뇌물끼'가 아슬아슬 섞여있는 품목이었던 것도 같다. 그런 이미지때문에 훗날 진짜 뇌물을 줄 때 케잌상자에 넣어서 전달하는 풍습이 생겼던게 아닌가 추측해 본다. '나마까시'라고 불리던 화과자(和菓子)도 대단히 고급에 속했는데 파는 곳이 많지않아 아는 사람도 드물었다. 

아버지들은 가장으로서 퇴근길에 그날 주머니사정에 따라 버스정류장에서 이것저것 군것질거리를 사들고 들어갔고 아이들은 또 그걸 기다리다 환호하는게 도시가정의 풍경이었다. 군고구마, 과자 이런 군것질 거리는 그 자체가 가져다주는 맛을 넘어선 무언가가 있었다. 경제사정이 더 어려운 집도 많아서 그런 집은 어쩌다 여유가 있는 날은 생선, 돼지고기 이런 부식거리를 사가지고 귀가를 하였으니 달달한 간식거리는 아버지의 직장이 튼튼하고 살림은 앞으로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상징하는 단 맛이기도 하였다. 

버스정류장 앞에서 겨울철에 팔았던 간식거리를 생각해보니 사과, 군밤, 땅콩, 군고구마가 제일 많이 떠오른다. 그래서 나는 사오십년전에 서울의 평범한 서민가정에서 유소년기를 보낸 사람으로서 간식거리 4대천왕으로 이 네가지 품목을 선정하였다. 

사과: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사과는 크게 국광 홍옥 두가지로 나뉘었다. 국광은 색깔이 그다지 예쁘지 않고 알이 잘았는데 꽤 단단하였다. 잇몸이 약한 사람이 그냥 베어물면 피가 나는 정도가 아니라 이빨이 흔들리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로 단단하였다. 어렸을 때 기억이니까 과장이 섞인 것도 같은데 지금 구할 수가 없으니 내자신도 확인할 길이 없어 좀 아쉽긴하다. 단단한만큼 오래 두어도 변하지 않았고 그런 식감을 좋아했던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홍옥은 알이 국광보다 굵고 새빨간 빛깔이 예쁘게 반짝이는게 특징이었는데 맛이 시었다. 신맛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었고 국광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퍼석퍼석하고 시어서 싫다고 했다. 나중에 더 달고 부드러운 스타킹이라는게 나왔고 다 익어도 푸른 색깔을 띈 골든델리셔스라는 품종이 나왔는데 이게 참 달았다. 개량에 개량을 거듭하여 훗날 달고 부드럽기가 이를데 없는 후지 혹은 부사라고 불리는 사과가 나온 뒤에 이 옛추억의 사과들은 종적을 감추어버렸다. 요새도 노력을 하면 홍옥은 구할 수가 있다는 소문은 들었다. 나는 어려서 국광은 딱딱해서, 홍옥은 시어서 별로 안좋아했다. 스타킹, 골덴이 나오고서야 좀 먹었던 것 같은데 그것도 누가 깎아주기나 해야 몇점 먹었으니 그렇게 몸에 좋은 과일이라는 사과하고는 깊은 인연은 아니었나 보다. 

군밤:

군밤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군밤을 대단히 좋아하는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세상엔 군밤을 좋아하는 사람과, 아주 좋아하는 사람과 아주 아주 좋아하는 사람 그리고 군밤이 뭔지 아예 모르는 사람만 있을 뿐이라고. 맛을 알고는 안좋아하기가 불가능한게 군밤인 것 같다. 어려서 손님이 군밤을 사오시면 너무나 반가왔다. 군밤이 맛있는데 간혹 껍질이 잘 안까지는 놈이 있으면 짜증이 난다. 군밤의 완성은 노랗게 잘익은 군밤이 매끈하게 톡톡 튀어나오는 데에 있다. 시골에 내려갔을 때 할아버지가 화롯불에 군밤을 자주 구워주셨다. 주머니칼로 생밤에 솜씨좋게 칼집을 낸 뒤 잿속에 묻어놓았다 꺼내주시면 나는 호호 불어서 재를 날린뒤 까먹곤 했다. 

삼년뒤에 또 큰 병을 앓고 건강이 나빠져 다시 시골에 내려갔을땐 나도 혼자서 군밤만들기에 여러번 도전을 하였다. 열살 때였다. 과도로 칼집을 내다가 매끈한 껍질위에서 칼날이 미끄러져 손을 베기도 했고 잿속에서 꺼내는 시간을 못맞춰 새카맣게 숯이 되거나 설익은 걸 꺼내기가 일쑤였는데 가장 큰 재난은 칼집이 제대로 안나서 잿속에서 밤이 뻥뻥하고 폭발을 하는 거였다. 그 때는 화로가 아니라 아궁이속의 잿불이어서 방안에서 불이 안튄게 그나마 다행이었는데 한번은 이마에 맞아 부어오르기도 했다. 어른들은 군밤을 굽다가 눈이 먼 아이도 있었다고 겁을 주었는데 진위여부는 아직도 아리송하다. 그해 겨울, 시행착오를 거듭하다가 군밤의 달인까지는 아니어도 고수정도는 되었다고 자부할 무렵 봄이 찾아왔고 건강을 추스린 나는 학교를 다니기위해 서울로 올라왔다. 그 뒤로 밤을 구워본 건 기억에 몇 번 안된다.

따끔이 안에 뺀질이, 뺀질이 안에 텁텁이, 텁텁이 안에 오도독이 뭐게? 밤이야 밤. 여럿이 군밤을 먹으며 이런 수수께끼를 주고 받곤 했는데 정답을 알아도 싫증이 나지 않았다. 말을 들으며 밤의 모양을 머리속으로 따라가다가 고소한 알맹이가 나오면 그 맛이 너무나 기특해서 그랬겠지. 겨울이 있는 나라엔 군밤이 있는게 정상인 것 같다. 중국엘 가니 탕차오리즈(糖炒栗子)가 있었고, 일본에는 중국에서 온 것이겠지만 텐신아마구리(天津甘栗)가 있어서 반가왔다. 미국도 뉴욕엔 군밤이 있는데 겨울이 없는 LA에선 본 기억이 없다. 로마에도 있고 파리에도 있는 이 길거리 군밤문화가 세계만방에서 오래오래 갔으면 좋겠다. 밤이라면 몽블랑케잌, 마론글라쎄, 밤양갱 가리지않고 다좋아하지만 나는 특히 군밤을 참 좋아한다. 재작년인가 휴대폰을 바꾸러 간 길에 압구정역 전화국 앞에서 군밤을 팔길래 사서 먹었다. 먹다가 빠직하는 소리가 났다. 왼쪽 작은 어금니 한쪽이 떨어져 나간거였다. 그래도 나는 군밤을 탓하지 않고 약해진 내 이빨로 원인을 돌렸다. 그만큼 군밤을 사랑한다.  

땅콩: 

견과류의 대표선수는 뭐니뭐니해도 땅콩이지 싶다. 2년전인가 마카다미아가 발단이 되어 해외까지 유명해진 사건이 일어났을 때도, 우리는 마카다미아의 인격, 아니 콩격을 무시하고 땅콩항공, 땅콩회항 이렇게 부르지 않았던가. 얼굴 하얗고 머리 노란 서양사람은 국적불문하고 양키라고 불리던 시절이 있었던 한국땅에서 마카다미아는 소수민족, 아니 소수견과의 설움을 겪어야 했다. 그 배경에는 오랜 세월 한국의 서민과 끈끈한 연을 맺어온 땅콩이 있는 것이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도 땅콩은 흔한 간식거리였던 것 같다. 집에서도 자주 먹을 기회가 있었다. 버스정거장마다 땅콩을 수북하게 쌓아놓고 파는 리어커 행상들이 많았다. 됫박으로 담아서 신문지로 만든 봉투에 담아서 주었다. 가난한 연인들도 땅콩을 사먹을 수 있을 만큼 가격이 만만했는지 겨울이면 땅콩을 사서 남자 외투주머니에 넣고 남녀가 한주머니에 손을 넣고 같이 꺼내먹으며 길을 걷는 모습이 흔했다. 어린 마음에도 그 모습이 부러웠던지 나도 크면 해봐야지하고 마음먹었던 것 같은데 실행에 옮긴 기억은 없다. 

땅콩하면 생각나는 노래가 두 곡이 있다. 공군이 부르는 노래라고 알고있는데 '하늘을 마음대로 주름잡는 사나이 그이름은 독수리 성난 독수리...' 이런 곡이었다. 이걸 '도끼를 마음대로 휘두르는 사나이 그 이름은 고재봉 성난 고재봉...' 아이들은 가사를 이렇게 고쳐불렀다. 고쳐부른게 아니라 개사한 노래를 먼저 접하고 나중에 원곡이 공군노래라는 걸 알게 되었다는게 맞는 표현이다. 고재봉은 당시 여섯명 일가족을 참살한 희대의 살인마였다. 전국에 수배령이 내렸는데 그를 알아보고 미행하여 경찰에 신고, 검거에 공을 세운 사람이 땅콩행상이었다. 그래서 나온게 '고재봉 잡는데는 땅콩장수 최~고 델라이 컴앤 왕고홈...'  이런 노래였다. 아이들은 사건도 잘모르고 가사 뜻도 모른채 불렀는데  원곡은 해리 벨라폰테의 Banana Boat Song 이었다. 

그 때는 경찰의 수배망은 피해도 땅콩장수의 눈을 피하기는 어려울만큼 땅콩행상이 여기저기 많았음을 이 사건에서 알 수 있다고 하면 지나친 비약이려나? 델라이 컴앤 왕고홈 하니까 뜻도 모르고 들리는 대로 따라부른 영어노래 하나가 또 생각난다. '...브록마 리를 볼 러포셔 넘보나인...' 대충 이렇게 부르거나 짖궂은 가사로 바꿔 불렀는데 어른이 되어 알고보니 'Love Potion No 9' 이라는 노래였다. 여자에게 인기가 없는 사나이가 고충을 상담하러 점보는 집시여인에게 갔다가 처방을 받은게 '사랑의 묘약 9번'이라는 내용의 노래다. 가사를 찾아보고 해서 귀에 내용이 들리고 나니 오히려 어릴적 추억이 희석되어 좀 아쉬운 경우다.   

군고구마:

누나하고 나에게는 어려서부터 군고구마하면 특별하게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언제나 군고구마를 사오시던 복실이 아주머니다. 어머니하고 중고교, 그리고 당시엔 드물게 대학까지 함께 다닌 단짝친구셨는데 키가 크고 바짝 마르신데다가 안경까지 쓰셔서 처음보면 좀 날카롭고 신경질적인 인상이기도 하셨다. 하지만 정말로 시원시원하고 화끈한 성격의 소유자인데다가 인정도 많으신 분이셨다. 어머니가 나오신 고녀(요즈음 여고에 해당)는 원산에 있는 미션계학교였는데 지리적인 이유로 동창친구는 함경도 분들이 많았다. 모이면 모두들 걸죽하게 욕도 잘하시고 손도 크셔서 요즘말로 포스가 장난이 아니었다. 

복실이 아주머니는 남편의 경제력이 든든해서 우리보다 살림형편이 훨씬 나았다. 어머니에게 소고기, 계란 또는 갈비같은 것도 사오셨지만 우리들에게도 늘 먹을 걸 사오는 걸 잊지 않으셨다. 어머니는 답례로 겨울이면 명란젓 창난젓 아가미젓 등을 담가 보내셨다. 아주머니 댁은 신당동이었는데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게 한번은 오전에 오셨다. 내가 기억못하는 무슨 일이 있었겠지. 대문을 들어서면서 큰소리로 '얘 얘, 택시를 타고 오려고 했는데 아침이라고 안태워 줘서 전차타고 버스 갈아타고 오느라 늦었지 뭐니' 하시면서 깔깔 웃으셨다. 나중에 어머니가 말씀하시길 여자, 특히 안경쓴 여자는 아침에 태우면 재수없다고 택시운전수가 기피한다고 했다. 그런 시절이었다. 어쨌거나 그런 수모를 깔깔 웃으며 털어버릴 정도로 대범한 분이셨다. 

그런 아주머니께서 가을에 접어들고 군고구마 장수가 거리에 나서면 그때부터 늘 우리집에 군고구마를 사오셨다. 우리는 복실이아줌마의 군고구마로 찬바람이 불고 계절이 바뀌는 걸 알았다. 내 기억에는 없지만 봄이 와서 군고구마가 맛이 없어지는 끝물까지 사오셨다고 들었다. 고구마는 그 때 물고구마 밤고구마 이렇게 두가지로 나뉘었다. 물과 밤이라는 말에서 보이듯이 밤고구마는 달고 파삭파삭했고 물고구마는 수분이 많고 단 맛이 덜했던 것 같다. 아이들은 당연히 밤고구마를 선호했는데, 세월이 흐른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니 물고구마는 물고구마대로 맛이 있을 것 같다. 

군고구마를 길에서 먹을 때야 할 수 없었지만 집에서 먹을 때는 목이 메지말라고 김치국물을 같이 먹었는데 맵기와 짜기가 요즘 같지않고 국수말아먹기 좋은 정도여서 아이들도 벌컥벌컥 마실 수가 있었다. 물론 시원한 무로 담가 잘익은 동치미 국물을 마시며 먹는 군고구마가 최고였지만. 나는 복실이 아주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외국에 머물고 있었고 부음을 나중에야 들었다. 우리 형제를 무척 귀여워해주시던 아주머니의 장례식에 조문을 못한게 지금도 마음에 걸린다. 지금도 군고구마하면 생각나는 분인데. 다시 한번 명복을 빌어야지. 

다른 간식거리.    

길거리 행상들이 파는 것 말고, 겨울철의 군것질하면 또 생각나는게 있으니 찹쌀떡하고 메밀묵, 그리고 쇼빵이다. 저녁상을 일찍 물리고 시골에서는 진작 잠이 들어야할 시간에 전기불이 있는 도회지의 생활리듬은 늦어지게 마련이다. 긴 겨울밤에 공부를 하던, 책을 읽던, 수를 놓던 배가 출출해질 때 쯤이면 멀리서 아련하게 '찹싸알 떠억' 하는 소리가 들려오고 곧 '메미일 묵'하는 소리가 뒤따르곤 했다. 테너와 베이스가 함께 다니는 듯 했는데 한사람이 내는 소리라고 했다. 추운 겨울밤이라 나는 감기든다고 못나가게 해서 본 적이 없는데 고등학생 교복을 입고 다닌다고 했다. 이제는 사어가 되어버린 '고학생'이 파는 거라고 했는데 사실은 그냥 떡만 파는 가짜 학생이라고 어른들이 수근거리는 걸 들었다. 

그리고 한밤중에 '쇼빵이요 쇼빵'하고 외치고 다니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쇼빵이란게 다른게 아니고 식빵을 그렇게 부른거 였다. 일본어로 쇼쿠팡이라 부르는 식빵을 그렇게 부르던 그 시절, 갓나온 식빵을 통에 담아 담요로 잘싸서 가지고 다니는 걸 덩어리로 사서 따뜻할 때 툭툭 손으로 갈라서 먹으면 그것만 먹어도 맛이 좋다고 했다. 한사람이 그러니까 요즈음 허니브레드라고 나오는 빵만하게 잘라 먹었던 것 같다. 우리 집은 밤에 파는 이 식빵은 사먹어 본 적이 없었다. 어머니가 가끔 식빵을 맛있게 구워주셨기 때문이다. 

그 식빵장수도 그렇고 우리 집도 그렇고 그때는 누구에게나 밀가루가 흔했다. 미국의 잉여농산물을 원조로 받아 모자라는 쌀을 대체하려고 대대적인 분식을 장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쌀을 살 돈이 없는 아주 가난한 집에서는 구호물자로 나온 밀가루로 칼국수를 해먹거나 수제비를 해먹었다. 일곱살때 시골에 내려가서였다. 마을 아이들하고 뒷산에서 놀다가  점심때가 되면 각자 집으로 돌아갔는데 나는 몇번인가 누군가의 집으로 따라간 적이 있었다. 매일 반복되는 생활이 무료하니 남의 집을 기웃거린 것이겠지. 

한번은 어느 집에서 점심을 얻어먹는데 정말이지 맛이 너무도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맹물에 간장타고 거기에 밀가루 반죽을 뜯어넣은게 전부였던 것 같다. 반찬이라고 올라온 건 고추장 한가지. 어린 마음에도 안먹으면 실례가 될 것 같아서 먹을만큼 먹었다는 표가 날만큼 먹느라 고생하였던 생각이 난다. 감자가 나기 시작하면 감자도 함께 넣고 호박이 나오면 호박도 넣고 해서 먹는게 수제비였던 것 같은데 그 집은 그만한 성의를 내서 끼니를 만들 여유조차 없을만큼 가난했던 집이었던 것이다. 

어머니가 만들어 주시던 맛있는 식빵이야기는 따로 해야겠다.       


나으 음식일기(5): 장독대로 올라간 소풍, 그리고 창경원 나의 반백년 음식일기

고대하던 소풍날 아침 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우천시에는 소풍이 연기가 된다고 예고가 되어있었을 것이다. 나는 대단히 심사가 틀어졌다. 학교를 안갔다. 한숨이 나오고 답답했다. 누나는 학교를 갔을 것이다. 지금 기억엔 집에 엄마하고 나하고 둘만 남았다. 하지만 계산해 보면 돐이 지나지 않은 동생이 있어야 옳다. 아마 집안일을 돌봐주는 누나가 봐주고 있었겠지. 기억이란게 이렇게 부분만 뽑아서 재구성을 하기도 하니 완전히 믿을 건 못된다.

나는 엄마의 관심을 모을 때까지 혼자서 계속 찡찡거렸다. 아이참, 흥흥. 왜 그래 소풍은 안가는거 아니잖아. 날좋을 때 가잖아. 에이 몰라. 김밥 먹을까? 싫어. 그럼 어떻게 할까? 모른다니까. 비가 와서 소풍을 못갔다고 심통이 난 아들을 달래다가 어머니도 약간 짜증이 나셨을 것이다. 얘, 내가 비를 오라 그랬니 어쨌니, 왜 엄마한테 그래. 어린 나이에 생각해도 맞는 말이지만 괜히 화가 치솟고 이유없이 억울한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엉엉 울기 시작했다. 

엄마는 금세 다정한 목소리로 나를 달래기 시작했다. 얘, 우리 소풍가서 밥먹을까? 어떻게? 잠시 울음을 멈추고 물었다. 산에 가는 것처럼 장독대에 올라가서 먹으면 되지. 비오잖아. 우산쓰고 우비입고 장화신고 장독대에 가서 소풍가방 풀고 엄마랑 재미있게 밥먹고 내려오자. 안해본 걸 한다는게 새롭기도 하고 어차피 대책이 없이 떼를 쓸 때는 이쪽도 퇴로가 열리면 그리 가야한다는 걸 알았기에 나는 응, 하고 대답을 했다.

어머니는 내 눈물을 씻겨주신 뒤 우비를 입히고 소풍배낭을 메워주셨다. 우산을 들고 모자가 함께 장독대에 올라갔다. 나는 금세 기분이 좋아져서 해해하고 웃었다. 어머니는 내 기분을 어떻게 맞춰주면 되는지를 잘 알고 계셨다. 소풍가방을 풀고 김밥을 꺼내고 물통을 꺼낸 뒤 내 손에 양갱을 하나 쥐어주시고 말씀하셨다. 자, 이제 옷도 젖고 감기들면 안되니까 내려가서 먹을까? 그늘을 찾아간다고 생각하고 마루로 가서 먹자. 나는 이미 착한 아이가 되어 응, 하고 즉각 대답을 했다. 

어머니는 훌륭한 교육자셨다. 어릴 적부터 우리 집에는 옛날에 배웠다는 어머니 제자들이 자주 찾아왔다. 내 눈에는 어머니하고 별반 나이차이가 나지않는 것 같은 아저씨 아주머니들이 와서 선생님 선생님하는게 신기했고 영원히 어른이었던 것 같았던 그들의 어린시절 추억담이 딴 세상이야기 같아서 신기했다. 이 사제관계는 꽤나 오래 이어졌는데 나는 어려선 그분들이 늘 빠지지않고 뭔가 사오는게 반가웠고, 커서는 엄마가 처녀시절에 제자들이 따르는 참 좋은 선생님이었다는게 자랑스러웠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삼우제를 지내고서 형제들이 어머니의 추억담을 공유하면서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형과 누나의 기억에는 어머니가 인자하시면서도 엄할 때는 엄하셨던 분이었다. 글씨를 너무 성의없이 썼다고 노트를 찢기기도 했고, 몰래 빌려온 만화책을 찢겨서 낭패를 보기도 했다고 했다. 나는 금시초문이라 엄마가 그렇게 무서웠어하고 물었는데, 모든 형제들로 부터 돌아온 대답은 하여간 엄마가 너한테만은 특별했어, 였다. 이건 워낙 많이 겪어서 나도 생각이 난다. 특히 누나가 그렇게 키우면 버릇나빠져요, 성질나빠져요라고 할 때마다 어머니는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래 너 시집가서 아들낳아서 너 하고싶은대로 키워. 내 아들은 내가 내맘대로 키울테니까' 그 때마다 나는 혓바닥을 메롱하고 내밀었다. 누이는 그때마다 얼마나 약이 올랐을까.

산으로 소풍을 가서 그늘을 찾는 상상을 하며 미끄러운 장독대에서 조심스레 내려온 우리는 마루로 들어왔고, 나는 김밥을 맛있게 먹었다. 위의 그림은 그 날의 이미지를 붓펜하고 색연필로 대충 그려본 것이다. 내가 빨간 장화를 신었고 노란 우비를 입었던 것은 생각이 난다. 어머니가 비오는 그날 어떤 복장을 하셨는지는 전혀 기억이 없다. 그냥 나의 기억속에 남아있는 어머니의 이미지를 그려본 것이다. 어머니는 내가 국민학교 4학년때까지는 한복을 주로 입으셨고, 그 이후에는 평소 양장을 입으시다가 무슨 날이면 한복을 입으셨던 것 같다. 고등학교 이후의 기억은 늘 양장이셨다. 

밥을 즐겁게 다 먹고나서 내가 뻔뻔한 건지, 애들이 원래 그런건지 모르겠는데 나는 살살 엄마와의 약속을 위반하기 시작했다. 

엄마, 나 과자 몇 개 먹어?
아까 얘기했잖아, 요깡 하나만 먹기로. 그대로 뒀다가 소풍가져가야지.
다른 거 두 개만 더먹으면 안돼?
그럼 딱 하나만 더 먹어라. 그대신 그 이상 더먹으면 소풍갈 때 다시 안사준다.
응, 알았어, 엄마

그 당시 소풍을 가는 날 비가 오면 부모들에게도 여러가지로 차질이 왔다. 우선 김밥을 두 번이나 싸야 했고 특히 과자를 두번 마련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 빠듯한 살림에 소풍에 가져갈 과자를 두번이나 장만하는 건 웬만한 집의 가계에 무리가 가는 일이었다. 그래서 모든 집에서 소풍배낭을 봉인하듯 그대로 모셔놓거나 했는데 이게 눈앞의 유혹에 견디지 못하는 아이들한테 통할 일인가. 야금야금 빼먹고 혼이 난 뒤 다시 채우거나 벌로 홀쭉해진 가방을 그대로 가져가거나, 집마다 작은 파란이 일었다. 나 역시 눈앞에 어른거리는 과자의 유혹에 빠져서 벽장속의 소풍배낭에 야금야금 손을 대었고 나중에 누나한테 혼난 기억이 남아있다. 그 해는 날씨탓이었는지 또 한번 연기가 되어서 정작 소풍날에 옥수수를 튀긴 강냉이만 가득 채워넣고 온 아이도 있었다. 

소풍갈 때 가져가는 도시락에 관해서 한가지 더 생각나는게 있다. 아이들이란 원래 짐같은 걸 가지고 다니길 싫어하는 법이다. 우산도 그렇고 장갑도 그렇고 다 자주 잃어버리는 물건들이다. 그런데 이게 또 잃어버리면 혼나는 것들이라 웬만하면 처음부터 가지고 다니길 꺼려하고 그랬다. 소풍을 갈 때는 과자는 다 먹어버리면 되고, 도시락도 다 먹으면 버리고 오는 일회용이 편했다. 그러니까 빈가방에 수통만 들고 집으로 가는게 정석이려니 했다. 

요즘 흔하디 흔한 스티로폼이나 플라스틱 용기가 나오기 훨씬 전이어서, 일회용 용기란게 별로 없었는데 유독 소풍때만은 다들 이걸 사용하였다. 나무로 만든 도시락이었다. 대패로 민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아주아주 얇게 켜낸 나무를 종이로 풀칠해서 이어 입체로 펼칠수 있게 만든 것이었다. 조악하기가 이를데 없었지만 한번 쓰고 버리는 것이니 상관하지 않았다. 사진이 없을 줄 알았는데 다행히 구글이미지 검색에서 아래 두장이 떴다. http://inti.kr/pt/3336794 님의 게시물에서 퍼온 것임을 밝혀둔다.              


소풍을 다녀오고 얼마 있어서인지 아니면 가을이었는지 애매한데, 어느날 우리식구가 다같이 창경원에 놀러간 적이 있었다. 지금은 창경궁이라는 고궁으로 복원이 되었지만 당시는 창경원이라는 이름으로 동물원을 겸하고 있어서 아이들한테 대단히 인기가 높은 곳이었다. 하기야 그 때는 서울구경이라고 해도 달리 갈만한 곳이 많지 않아서 시골에서 올라온 사람들에게도 창경원은 서울구경의 상징같은 장소였다. 그 날 같이 간 일행중에는 우리식구에 더하여 두명이 더있었다. 집에서 가사를 도와주는 누나하고 친척 아저씨 한명이었다. 시골에서 올라와 늘 집에서 일만하던 가정부누나에게도 창경원 나들이는 큰 이벤트였을 것이다. 

또 한명의 친척이란 해병대에서 복무를 하다가 휴가를 나온 병일이 아저씨였다. 어머니의 사촌 동생이니 나에게는 외종숙에 해당하는 분이다. 당신의 아버지, 그러니까 나의 작은 외할아버지가 무능하여 젊어서부터 고생도 참 많이 했다고 들었는데 늘 낙천적이었고 뛰어난 유우머 감각으로 사람을 잘웃겨서 우리형제들이 많이 좋아했다. 제대하고 우리집에 기거하던 적도 있었는데 어머니의 알선으로 큰 병원의 약리연구실에 취직을 하였다. 직장에서 연분을 만나 결혼을 한 뒤 내가 중학교 다닐 때 LA로 이민을 떠났다. 노래 '나성에 가면'이 유행을 하기 전이었으니까 아마 이민붐이 불던 초기였을 것이다. 떠나기전 부인을 동반하고 집으로 인사를 왔던 생각이 난다. '누님, 전 이젠 부모형제도 없고 하도 고생을 많이해서 이 땅에 아무런 미련이 없어요. 거기가서 열심히 살아볼께요.' 그리고는 정말 소식이 끊겼다. 지금 70대 중반을 넘어선 나이가 되셨을텐데 잘지내시는지 궁금하다.

우리는 동물구경을 하였을 것이고 그리고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았을 것이다. 도시락보따리를 풀면서부터 내 기억이 생생하다. 그 때 가지고 간 도시라보자기를 풀자 칠기로 만든 삼단찬합이 의젓한 모습을 드러내었다. 아래는 검색에서 찾은 이미지인데 내 기억속의 그것과 아주 흡사하다. 삼단으로 구성되 찬합을 펼치면 알록달록 가지가지 음식이 담겨있었다. 맛있는 음식의 향기와 칠기의 냄새가 함께 어울려 좋은 날의 즐거운 이미지가 중첩이 되어있어서 지금도 나는 깨끗이 씻은 찬합의 안에서 풍겨나오는 칠기 고유의 냄새를 좋아한다. 

그당시는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 이 칠기찬합이란게 일제잔재라는 걸 알고는 나의 유년시절의 이곳 저곳에 박힌 다른 일본문화의 조각들과 함께 나를 서글프게 할 때도 있었다. 먼 훗날 일본에 가서 옻칠장인 전용복 선생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 분이 일본에서 얼마나 존경받는 인물인지는 알고 있었는데, 그 분께서 직접 본인이 작업한 메구로 가죠엔(아서원)을 안내하고 설명해 주시며 조선의 칠기가 일본보다 뛰어나다고 하셔서 나의 상했던 자존심은 얼마간 회복되었다. 참고로 이 가죠엔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나오는 건물의 모델이 된 걸로도 유명하다(관심있으신 분들은 '目黒 雅叙園 と千尋の神隠し'로 검색하여 보면 자료들이 나옵니다).

우리들은 김밥, 유부초밥, 갖가지 요리들을 맛있게 먹으며 창경원에서 즐거운 하루를 보냈다. 솔직히 지금 내기억에는 김밥, 유부초밥 말고는 다른 음식이 뭐가 있었는지는 하나도 생각이 안난다. 같은 찬합에 음식을 싸서 갔는데 메뉴가 생생하게 생각나는 건 나중에 형이 알오티씨 훈련을 받으러 수색 30사단에 들어간 여름 면회를 갔을 때였다. 김밥은 없이 유부초밥만 싸고 대신 불고기, 갈비찜, 통닭 등 고기반찬이 많았다. 새카맣게 그을려서 이빨만 하얗게 보이는 형을 만났는데 기대했던 것만큼 와구와구 먹지않아 좀 더 잘 먹어주었으면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형편도 어렵게 살던 때여서 뭔가 특별한 음식을 만들어 도시락을 싼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식구들이 모여서 산으로 들로 나간다는게 참 소중한 기회였다. 그만큼 단조로운 일상을 살던 시절이었다. 시골에서 가을에 국민학교 운동회를 하면 모든 마을이 모여서 그날 하루 그 행사를 큰 축제로 즐겼다. 내가 시골에 내려갔을 때 운동회를 구경갔다가 땡볕에 피곤하기도 하고 시들해져서 혼자 슬그머니 집으로 돌아온 적이 있었다. 

마을은 아무도 없었고 말그대로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 따가운 가을 햇살이 내리쬐는 이른 오후 아주 멀리 남의 집 외양간에서 소가 부시럭 거리는 소리, 파리가 두어마리 날아다니는 소리, 어디선가 낮잠을 자는 돼지가 꿀꿀하고 잠꼬대하는 소리. 이런게 너무나도 생생하게 들렸다. 그리고 그런 조그만 잡음이 이따금씩 고요를 깨는 순간말고는 귓전에 계속해서 찌잉하는 소리가 맴도는 것 같았다. 일곱살 먹은 나는 텅빈 집 툇마루에 앉아 멍하니 마당을 내려다보며, 처음으로 이 세상에 나혼자 남겨진 것 같은 경험을 하였고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느낌도 처음 알게 되었다. 서울에 있는 엄마가 너무도 보고싶었다.


나으 음식일기(4): 생애 첫 도시락과 논두렁 점심 나의 반백년 음식일기


지금 생각해보면 옛날엔 하루세끼가 참으로 단순하였다. 식단이 단순하였다기 보다는 식사의 패턴이 단순하였다는 것이다. 삼시세끼를 집에서 먹는게 당연한 것이어서, 학교를 다니는 학생은 한끼를 도시락으로, 직장에 나가는 가장은 점심을 외식으로 먹는 것 말고는 다 집에서 먹는 걸로 알고 살았다. 내가 어릴 때니까 오십여년전 이야기다. 직장에도 도시락을 싸가는 사람이 적지 않았으니 외식 의존도는 대단히 낮았다. 식단도 세끼 모두 밥을 기본으로 하여 아침식사와 저녁식사에 그다지 차이가 없었다. 아침을 든든히 먹는다는 건 국이나 찌개 그리고 이런저런 반찬으로 차린 밥상에 앉아 따뜻한 밥을 한그릇 먹는다는 걸 의미했다. 

서너살 때 이야기다. 저녁을 먹고난 뒤 한참 지나서 네살위의 누나와 잠자리에 들무렵 또는 막 잠이 들었을 때 아버지가 돌아오시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면 어머니는 부엌에 나가서 아버지의 밥상을 보았다. 국을 데우고 계란도 부치고 김치도 새로 꺼내어 썰고해서 차린 소반을 가지고 들어오신 뒤 아랫묵 이불속에 묻어둔 밥그릇을 꺼내어 소반위에 얹으면 상보기가 완성되었다. 아버지는 상에 올라온 찌개나 반찬을 안주삼아 반주를 여유있게 몇잔 하시고서야 천천히 밥뚜껑을 열고 숟가락을 드셨다. 밥뚜껑 안쪽으로는 이슬이 송글송글 맺혀있었고 적당히 미지근하게 온기를 머금은 하얀 밥은 두어시간전 우리가 먹었던 뜨거운 밥보다 훨씬 맛이 있었다. 약주를 좋아하시던 아버지는 늦게 따로 드실 경우 밥을 다 드시는 법이 없었고 누나와 나는 아버지의 저녁을 빼앗아 먹는데 맛이 들렸다. 나이차가 꽤나는 형은 이장면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기억에는 없지만 아마 자기 방에서 공부를 하거나 했겠지. 

아버지가 드시는 밥을 얻어먹으면 그냥 기분상 더 맛있는 것 같았던 거라고 여기고 있었는데, 나중에 뜨거운 밥이 시간을 두고 적당한 온도로 식으면서 전분이 당분으로 바뀌어서 씹으면 더 고소하고 단 맛이 난다는 걸 알았다. 어떤 날은 들어오셔서 '저녁을 밖에서 먹었어요. 밥생각이 없으니 차리지 말아요'라고 하시는 경우도 종종 있었는데 그 때마다 어머니는 '밖에서 드시는게 뭐 변변한게 있다고, 저녁은 집에 와서 드셔야지요'라고 말씀하셨다. 

이건 우리집이 특별히 잘사는 집라서 그런 것도 아니고, 당시 모든 집의 주부가 가족의 성원가운데 누군가가 밖에서 끼니를 때우고 오면 하는 말이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 당시는 밖에서 파는 음식에는 변변한 게 없었던 시절이라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가장이 밖에서 맛있는 걸 먹어도 티를 내지말고 집밥이 최고라고 하기로 공모를 하여 대한민국의 모든 주부를 속이는데 성공했던게 아니라면. 

그러니까 모든 주부들은 일년에 천끼니 이상의 식사를 집에서 만들어야 했는데 넉넉치 않은 살림에 갖은 지혜를 다 발휘해야 했을 것이다. 냉장고가 없었고 비닐하우스 재배 이런게 보급되지 않았던게 식단을 짜기에는 어떤 면으로는 좋았는지도 모르겠다. 매일매일 장을 보아야 했고 밥상위의 변화는 계절이 가져다주던 시절이었으니까. 겨우내내 김장김치와 무김치를 먹으면서 시래기, 미역, 북어 등 말린 재료들이 국거리 노릇을 했고 꽁꽁 언 날씨에 동태를 비롯한 갖가지 생선을 조리거나 끓이거나 구워서 반찬으로 먹었다. 

땅에 묻은 김장이 슬슬 시어지면서 군내가 나기 시작하면 찌개로 끓여먹고 씻어서 다져서 만두도 빚어먹고 그랬다. 그러면 즈음해서 신선한 맛으로 입맛을 돋구는 달래며 냉이같은 봄나물이 나왔고 어린 열무나 배추로 김치를 담글 수 있을 때까지 끈을 이어주는게 사시사철 나오는 콩나물과 두부, 말린 고사리 콩자반 장아찌 등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일년내내 보는 야채인 시금치도, 가지도, 호박도 그 때는 계절이 되어야 먹을 수 있었다. 시장에 가니 뭐뭐가 벌써 나왔더라는 걸로 계절의 변화를 알던 시절이었다. 엄마를 졸졸 따라다녔던 나는 시장 초입에 늘어선 과일가게에서 딸기, 자두 복숭아, 참외 수박, 포도 배, 사과가 내뿜는 강렬한 향기로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익혔던 기억이 생생하다. 

사람은 반복되는 일상에서 안정을 찾기도 하지만 또 거기서 벗어나는 변화에서 즐거움을 찾기도 하는 법이다. 어쩌다 해먹는 수제비, 칼국수가 별식으로 맛있고 비오는 날 부쳐먹는 밀가루 전이나 빈대떡은 간식으로 그만이었을 것이다. 똑같은 밥도 밖에 나가서 먹으면 더 맛있게 느껴진다. 실제로 일곱살 때 시골에 내려가 살았는데 나는 마을사람들이 논두렁에서 점심을 먹을 때 자주 따라가 먹었다. 마을의 어른이셨던 할아버지의 서울사는 손자가 아파서 내려왔다는 걸 마을사람들은 다알았고 모두가 잘해주었다. 야, 할아버이하구 먹으면 맛있는거 마이 먹을텐데 여기서 먹는게 좋너? 내가 고개를 끄덕이면 어른들은 만족해하며 끼워주었다. 

남자들이 논에 나가서 일을 하면 여자들은 점심때에 맞춰 보리밥, 감자밥에 늘 집에서 먹는 무생채, 풋김치, 고추장, 호박무침 이런걸 함지박에 이고와서 논두렁에 펼쳐 놓는다. 말그대로 매일 그나물에 그밥이다. 그런데 모두들 참 맛있게 먹었고 나도 그게 좋았다. 남자들이 사발로 따라서 마시는 막걸리가 입가에서 흘러 턱을 지나 목을 타고 내려가 적삼안으로 들어가는 걸 보면 내 옷이 젖는 것 같아서 늘 불안해했다. 재미있는 건 같은 막걸리인데 사람들이 방안에서 마시면 시큼한 냄새가 나서 별로 유쾌하지가 않았는데 이상하게 논두렁에서 마시면 달콤한 냄새가 나서 어린 마음에도 신기하게 여겼던 기억이 있다. 이 나물 저 푸성귀 양푼에 쏟아넣고 고추장으로 썩썩 비벼먹는 건 아마 여기서 습득한 노하우지 싶다. 

같은 음식이라도 밖에서 먹으면 머리의 체온이 낮아져서 더 식욕을 돋구고 그래서 더욱 음식을 맛있게 먹게 된다는 것도 나중에 알았다. 그러니까 논에서 들에서 밥을 먹으면 기분이 유쾌해서만이 아니라 같은 거라도 생리적으로 더 맛이 좋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특히 바람이 잘부는 곳이 머리에서 땀이 잘 증발하므로 더 그렇다고 한다. 서양의 피크닉도 그런 원리로 사람들이 더 맛있게 먹는다는 이야기다. 그러고보니 외풍이 심한 집에서 좀 추워하며 먹었던 밥이 온도가 높은 아파트에서 보다 맛있게 느껴졌던게 아닌가도 싶다.   

다시 이야기는 서울로 돌아와, 나는 학교에 들어가고서도 밥은 세끼 집에서 먹었다.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뉘어 하루 서너시간 있다가 돌아오는 일학년이었으니까. 그런데 어느 날인지 도시락을 싸가는 날이 있었다. 학부모들 수업참관이었는지 아니면 무슨 다른 행사가 있었는지는 전혀 기억에 없는데, 딱 하루 도시락을 싸가서 학교에서 점심을 먹었다는 건 생생하게 기억에 남는다. 통지를 받은 이틀전부터 약간 흥분된 상태로 그날을 맞았고 점심시간이 될 때까지 자못 긴장한 상태였을 것이다. 공부하는 교실에서 밥을 먹는다는 새로운 경험에 나도 언니 누나들처럼 큰 사람이 된 것같은 느낌이 들었다. 잊지도 않는다. 그 날의 반찬은 오징어볶음이었다. 

위의 사진은 구글에서 그나마 비슷한 도시락과 오징어볶음 이미지를 찾아낸 것이다. 아래에 다시 붙여 넣는다. 도시락은 이것보다 작았고 그대신 턱이 높았다. 

엄마, 나 모레 벤또 싸가는 날이야. 벤또 싸주세요. 나는 전전날 가슴이 뿌듯하게 어머니에게 도시락을 요구하였고 어머니는 뭐먹고 싶냐고 물었다.확실하진 않지만 어머니는 달걀부침도 이야기하지 않았나 싶다. 그건 큰 맘을 먹어야 가능한 반찬이었을 것이다. 나는 오징어볶음이 좋겠다고 이야기한 것 같다. 달걀부침을 반찬으로 매일 싸올 수 있는 건 어느정도 잘사는 집 아이라야 가능했던 것도 내가 중학교를 들어간 이후였다. 국민학교 때는 검정콩자반, 뱅어포구이, 장아찌, 콩나물 무침 주로 이런게 도시락 반찬들이었다. 도시락을 못싸오는 아이들도 많아서 학교에서 급식으로 옥수수빵을 주던 시절이었다. 달걀부침과 장조림은 자칫 빈축을 사는 금단의 반찬이었다. 그 때는 왕따니 이지메니 이런게 요새같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다같이 못살던 시절이라 가난한 아이가 아니라 한반에 한 둘 있는 잘사는 집 아이가 눈총을 받았던 것 같다. 어쨌거나 나는 희망대로 오징어 볶음을 반찬으로 싸서 가져갔다. 당시 오징어볶음은 생물이 아니라 대개가 마른 오징어를 물에 불려 파, 간장, 설탕, 고추가루 양념으로 볶은 것이었다. 이런 레시피는 당시엔 물론 알리가 없었고 그냥 달콤하고 짭짤해서 대단히 좋아했다. 특히 간이 배고 잘익어 숨이죽은 대파를 건져먹으면 달콤하니 참 맛이 좋았다.  

반에서 나이도 어리고 몸집도 제일 쪼그매서 맨 앞에 앉았던 나는 담임 선생님께서 무척이나 귀여워해주셨다. 이름은 김정숙, 미혼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초등학교 이야기를 할라치면 왕년에 공부못하고 반장 회장 한번 못해본 사람을 나역시 아직까지 본 적이 없지만, 어쨌거나 나도 공부를 잘했다. 그런데 기타 방면으로 나이값을 한건지 모자라는게 많았는지, 학교 끝나면 신발도 꼭 선생님이 신겨주시고, 비오는 날 우비를 여미고, 우산을 펴주고 다 선생님께서 해주셨다. 특히 들어가서 몇달만에 운동화는 겨우 왼쪽 오른쪽을 구별하게 되었는데 장화는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혼자 신어봐, 이렇게 말씀하시고는 또 꺼꾸로 신었네 바꿔신어야지 하시면서 까르르 웃곤 하시던게 기억난다. 나는 그 때 마음에 왜 이래도 쑥 들어가고 저래도 맞는데 굳이 왼발 오른발을 구별해야 하는지 그게 더 답답했다. 여자 고무신처럼 마음대로 신도록 만들면 될텐데 이렇게 생각도 했었다. 

그날 점심시간이 되어 드디어 도시락을 펼쳤다. 처음부터였는지 아니면 보다 못해서 중간부터 나섰는지는 모르겠는데 나는 선생님께서 도시락을 밥 한번 반찬 한번 번갈아가며 먹여주셨다. 마지막에 밥이 얼마 안남자 물을 부어서 싹싹 긁어서 다먹여주시고는 아유 참 잘먹었어요라고 칭찬을 해주셨다. 이게 내 인생의 첫번째 도시락 식사다.  

그리고 일학년때 집밖에서 밥먹은 것 가운데 또렸하게 기억에 남는게 두차례가 더 있는데 하나는 소풍이요, 다른 하나는 식구들이 다함께 창경원에 놀러간 것이다. 봄소풍은 비가 와서 두번이나 연기가 되어 아이들의 애간장을 녹였는데 나는 비가 주룩주룩 내려서 소풍이 취소된게 너무도 속상하여 엄마한테 짜증을 내고 화풀이를 하였다. 학교터를 닦을 때 소사가 뱀을 잡아서 저주를 받았서 소풍때면 비가 내린다는 이야기를 믿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어느 학교에나 있는 이야기였고 더 놀랐던 건 이 버전이 일본에도 통용되는 이야기였다는 걸 알았을 때였다. 

아래는 재작년엔가 그 때 소풍이 생각나서 휴일날 메모지에 끄적거려 블로그에 올렸던 그림이다. 요새 옛날 이야기를 하다보니까 사진보다는 기억속의 이미지를 꺼내고 싶어서인지 자꾸 그림을 그리고 싶은 충동이 이는데 시간이 없는게 좀 아쉽긴 하다. 여섯살때 소풍간 이야기와 창경원에 놀러간 이야기도 기록해 놓아야지. 




나으 음식일기(3): 밤과자와 쵸콜릿 그리고 웨하스 향기 나의 반백년 음식일기


정릉 후생주택에서 살 때 담장을 마주한 이웃이 세집이었다. 북쪽으로 난 대문은 도로에 면하고 있었고, 동,서 양 옆으로 한집씩 그리고 남쪽 앞뜰 너머로 한집 이렇게 세집이 서로 나무판자를 이어서 만든 담을 사이에 두고 사이좋게 살았다. 앞뜰 너머로 있던 집은 나중에 아예 사람이 드나들 만큼 담장을 뜯어내고 지냈다. 기억하기에 아마도 우리집에서 물을 길어가느라 그랬을 것이다. 당시에는 상수도가 나오는 둥 마는둥 시원찮았고 집집마다 우물을 판 뒤 펌프를 묻어 사용하였다. 우리집 '뽐뿌'가 물이 잘나왔던가 물맛이 좋았던가 였을텐테 정확한 이유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집에는 내 또래의 아이는 없고 대신 누나들이 여럿있었고, 형이 하나 있었다. 그래도 나는 그집을 자주 놀러갔다. 다른 누나들이나 형에 대한 기억은 별로 남은게 없고, 청자라는 이름의 누나가 나를 귀여워해주었던 게 생각난다. 그 집 아주머니는 대단한 근시여서 눈이 팽팽 돌아가는 두꺼운 안경을 쓰고 계셨다. 옛날에는 안경을 쓴 사람이 적은 편이어서 안경을 쓴 것만으로도 '목사(눈이 네개)'니 어쩌니 별명이 붙기도 했다. 요즘같이 고굴절 압축렌즈라는게 없었던 모양이어서 안경을 쓴 사람 가운데에는 그런 안경을 쓰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중에 일본에 가서보니 '우유병 밑바닥같은 안경(牛乳瓶の底みたいなメガネ)', '병바닥안경(瓶底メガネ)' 같은 표현이 보편화되어 있었고, 개그만화에서 그걸 뱅글뱅글 소용돌이 모양의 안경알로 표현하고 있는게 흥미로웠다. 하긴 요즈음엔 우유용기도 종이팩 아니면 플라스틱이 대세니 우유병 밑바닥이라는 표현이 얼마나 실감이 가는지 의문이지만. 

그집에는 늘 빌려다 보는건지 가면 언제나 만화책이 있었다. 나는 한글을 아주 일찍 깨쳐서 금세 만화에 푹빠졌는데 그집에 만화를 보러 자주 놀러갔다. 그러면 젖먹이 같은 아이(성장이 느려서 나이보다도 더 어려보였다)가 만화를 읽는다고 다들 신기해 하였고, 그러면 청자누나는 얘가 그림만 보는게 아니에요 얘 소리내서 읽어봐봐 이렇게 시켰다. 나는 한두페이지 정도를 소리내어 읽었고 사람들이 신통해하면 그 누나는 그걸 퍽 자랑스러워 하였다. 그 때 얻어먹고 하던게 드롭푸스 사탕이다. 

내가 어렸을 때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과자하면 당연히 사탕이 넘버원이었다. 어른들이 돈을 줄 때에도 과자(아니면 까까) 사먹어라하는 것 보다는 사탕 사먹어라하고 주는 경우가 더 많았으니까. 그런데 나는 솔직히 사탕을 특별히 좋아했던 것 같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 때는 드롭푸스라고 하여 알록달록한 사탕이 고급이었는데 깡통에 든 게 더 고급이었다. 아래 오른쪽의 사탕은 딸기맛이 나는 건데 이건 그런대로 좋아했다. 사탕도 색깔따라 편식을 한 셈이다. 

내가 좋아한 사탕은 그당시 '빠다볼'이라고 불렸던, 나중에 세련되게 '버터 스카치'라고 개명된(제이름을 찾은?) 노란 사탕이었는데 이건 입맛에 맞았는지 한번에 연속으로 몇개씩 먹을 수가 있었다. 시골이야기는 나중에 따로 이야기 하겠지만 시골에 내려가고 나서는 갑자기 사탕을 좋아하게 되었다. 아무래도 당분이 귀한 생활환경 탓이었던 것이라 본다. 시골에서는 눈깔사탕도 아니고 좀 점잖지 못하게 개눈깔이라고들 불렀는데 나는 사탕보다도 그 겉에 붙어있는 오돌도돌한 설탕입자가 더 맛있었다. 아래 왼쪽이 눈깔사탕이고 오른쪽이 빠다볼 사진이다. 시골서 인기있던 개눈깔사탕은 더 크고 동그랬고 겉에 굵은 설탕입자가 붙어있었다. 아래 상단 왼쪽은 요즈음은 보기 힘든 것 같은데 이것도 귀하고 맛이 좋은 사탕에 속했다. 

  
이야기는 그 집의 옆집으로 건너간다. 청자누나네가 또 담장을 트고 지내는 집이 있었는데 그집은 도로에 면한 쪽으로 가게를 내고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정식으로 그집을 가려면 대문을 나가서 왼쪽으로 걸어가 도로가 교차하는데서 다시 왼쪽으로 돌아가 그집의 정문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러나 늘 두군데의 뚫린 담장을 통해 청자누나네를 거쳐 그집으로 놀러다니곤 했다. 그 집에는 내 또래의 여자아이가 있었는데 이름은 '블로레뜨'였다. 그 집 마루에는 도자기로 만든 성모마리아 상이 있었고, 벽에는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 상이 걸려있었다. 어려서도 그 집 사람들은 성당을 열심히 다닌다는 걸 막연하게 알았다. 

블로레뜨라는 이름은 나중에 찾아보아도 세례명에는 없었다. Flora라는 이름에서 나온 Florette라는 이름을 들리는 대로 블로레뜨 블로레뜨 이렇게 불렀던게 아닌가 추측해 볼 따름이다. 나보다 나이가 두살 많았던 블로레뜨는 심성이 착해서 아이들이 빵을 가져 나오라 그러면 자주 요구를 들어주었던 것 같다. 그 때 제일 인기가 있었던 게 지금은 소보루빵, 단팥빵이라 불리는 '곰보빵'하고 '앙꼬빵'이었다. 내가 좋아하던 '빠다빵' '크림빵'은 나중에 학교를 들어가서 알게 되었고, '소라빵' '오란다빵' '사라다빵' 등은 꽤 뒤에 생겨난 메뉴이지 싶다. 원래 있었는데 내가 알게된게 나중일지도 모르지만.


후생주택에서 살 때에는 당연히 내가 돈을 주고 사먹을 나이가 아니었으니까 이 빵종류가 어느정도 대중적인 음식이었는지, 가격은 다른 식료품과 비교해서 심리적으로 어느 정도의 위치에 있었는지 알 길이 없다. 빵보다 더 생각나는 건 '셈베', '오꼬시' 같은 과자인데 이런건 비교적 흔하지 않았나 싶다. 가격이 만만하니 서로간에 왕래하면서 부담없이 사가는 품목이었다. 우리 동네에도 이걸 만드는 집이 있었는데 석탄을 기름에 짓이겨 만든 연료가 파랗게 불을 내는 위에 연신 반질반질한 틀에다 기름을 발라가며 구워내는 전병, 쌀튀긴걸 콩하고 섞은 뒤 물엿으로 굳히고 작두로 잘라내면 만들어지는 오꼬시(아래 두번째 사진인데 요새는 뭐라 부르는지 모름) 등을 만들어 팔았다. 나중에 학교를 들어가고나서 하교길에 한참이나 서서 만드는 과정을 싫증내지 않고 보곤 하였다.

이 과자집에서 만들어내는 제품 가운데 내가 매우 좋아하는게 하나 있었으니 바로 아래 사진, 그러니까 밤과자이다. 이건 당시에 나름 비싼 과자에 속해서, 근으로 달아서 팔던 시절에 전병 한근, 오꼬시 한근 거기에 '구리보로(밤과자를 그렇게 불렀다)' 반근 이런 식으로 샀던 것 같다. 딱딱한 전병, 쌀과자는 어른들이, 부드러운 밤과자는 어린아이가, 이렇게 먹었을 것이다. 최소한 우리집에서는. 


이런 이야기 잘못 꺼내면 특히 요즘같은 분위기에선 오해받을 지도 모르는 발언인데, 여자의 미모는 성인 남자보다 어린 남자아이가 더 따진다. 하기야 성격, 지식, 교양, 품성 등등의 다른 덕목을 어린 아이가 판별하고 인지할 능력이 없으니 외모를 더 중시하는 것처럼 보이는게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나도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데 아주 어린 나이에도 미인을 구분하는 눈은 있는 것 같다. 

우리 집 대문을 나서면 길건너편 집에 나보다 두살 많은 여자아이와 세살 터울의 남동생이 살고 있었다. 그러니까 남자아이는 나보다 한 살 어린 셈이다. 그집은 콜타르를 칠한 기다란 판자를 잇대어 만든 담장이 아니라 마름모꼴의 철망으로 담을 둘러친 집이었는데 담에는 넝쿨이 붙어 자라서 초록 빛의 담장이었던 기억이 난다. 군데 군데 장미꽃 같은 빨간 꽃이 피어있었던게 기억이 나는데 어린아이가 보기에도 모양이 예뻤다. 겨울에 잎이 지면 어떠했는지 기억에 없는 건 아마 추운 날엔 나가놀지 못해서 그런 것 같다. 

그 집 아이의 이름은 향기였다. 이건 지금도 기억하는 본명이다. 향기는 참 예뻤다. 나는 블로레뜨보다 향기하고 친하게 놀았다. 외모를 밝혀서만은 아니고, 사실은 그 집에 신기한 장난감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집 아버지는 외국을 다니는 마도로스라고 들었던 것 같다. 건전지를 넣으면 움직이며 물을 마시는 양철 원숭이, 조립식 철길과 기관차 등 다른데서는 볼 수 없는 이런 외국산 장난감들이 참 부러웠다. 가엾게도 향기의 남동생은 소아마비에 걸려 집안에서만 놀아야 했다. 나는 그집에 놀러가서 그 아이와 놀기도 하고 향기하고 소꿉장난도 하고 놀고 그랬는데 어느날 그집 어머니가 간식이라고 과자를 내왔다. 

너무나 부드럽고 달콤한 맛이라 잊을 수가 없었다. 나중에 알았는데 그걸 웨하스라고 불렀다. 그리고 기억을 더듬어 훨씬 뒤에 확인할 수가 있었는데 그당시 선명하게 기억했던 포장지의 로고는 나비스코(Nabisco)였다. 뒤에 국산이 등장을 했는데 웨하스만큼은 해태 롯데 이런것 보다는 크라운 것이 맛이 좋았다.     


그리고 부잣집 아이들은 평소에도 먹지만 보통 아이들은 소풍이나 가야지 먹을 수 있는 과자로 '미루꾸'라고 부르던 캬라멜이 있었다. 해태 캬라멜이 꽤 오래전부터 인기가 있었던 것 같다. 종이로 포장된 캬라멜을 하나씩 손에 쥐고 체온으로 부드럽게 녹인뒤 입에 넣으면 스르르 녹는 맛이 그만이었다. 심심한 걸 못참는 아이들이 그걸 점토놀이 하듯이 주물거려서 뱀같이 만들기도 하고 납작한 원반도 만들고 하다가 결국엔 입에 넣고 먹었는데 어른들이 보면 더럽다고 혼을 내기 십상이었다. 언제부터인가 신앙촌인가 하는 곳에서 만드는 '시온 캬라멜'이라는 제품을 여러번 먹게 되었는데 간이 포장을 한 대신에 덕용으로 크게 담아 방문판매를 했던 것 같았다. 나중에 '7공자'로 불렸던 그 단체의 교주아들이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는 사건을 접했을 때 나는 아, 캬라멜집 아들 이렇게 연상하였던 기억이 난다. 

나는 쵸콜릿을 평생 좋아하며 살았다. 누군가가 쵸콜릿을 좋아한다고 그러면 누가 더 좋아하나 대보고 싶은 마음이 생길만큼 좋아한다. 지금도 우리집에는 쵸콜릿이 떨어지는 법이 없다. 자주 다니는 출장인데도 매번 면세점 쵸콜릿 코너를 구경하는 걸 빼놓는 적이 드물고, 코스트코를 가서도 그 코너에 가서 산더미같이 쌓인 쵸콜릿을 보며 괜히 흐뭇해 하곤 한다. 

고등학교때 친구가운데 아주 잘사는 집 아이가 있었는데 그 집에 가보니 엄청큰 냉장고에 얼은 고기가 가득 들어있었고 지하에는 쌀이 가마니로 많이 쌓여있었다. 그 친구의 설명에 의하면 그집은 아버지께서 육이오전쟁통에 하도 배고픈 고생을 하셔서 늘 비상시를 대비해 먹을 걸 쌓아두는게 오래된 습관이라는 것이었다. 실용적이라기 보다는 심리적 안정을 보상받기 위한 습관일 것이었다. 나에게 쵸콜릿이 그렇다.

나는 아주 어려서 쵸콜릿의 황홀한 맛에 빠지고나서 헤어나지를 못했다. 그 때는 국산쵸콜릿이라는게 없어서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오는게 전부라 대단히 귀했을 것이다. 세살 크리스마스때 산타할아버지가 쵸콜릿을 놓고 가셨다. '새알 쵸콜릿'이라 불리는 것하고 '바둑판 쵸콜릿'이라 부르던 것 하고 두개였는데 너무나 맛이 좋았다. 바둑판은 한 칸씩 잘라서 형도 주고 누나도 주고하며 나누어 먹었는데, 새알은 한알 먹고 몇알 남았나 세어보고 한알먹고 또 세어보고 그랬다. 브랜드로 말하자면 지금도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전자가 M&M이요, 후자가 허시스이다. 내가 착한 일을 많이 하였는지 그 다음해 크리스마스에도 산타는 어김없이 새알쵸콜릿과 바둑판 쵸콜릿을 가져다 주셨다. 

바로 위의 사진은 올드, 빈티지 이런 검색어를 섞어서 구글에서 찾은 것들인데 바로 딱 이런 모양이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몇년이 흘러 국민학교 고학년때 한국에서 국산 쵸콜릿을 생산하게 되었다. 해태제과 양평동 공장에서 만들었는데 이걸 왜 기억하냐 하면 껌을 사고 그 포장지를 몇장인가 엽서에 발라 응모를 하면 견학을 시켜주는 행사가 있었다. 시민회관(지금의 세종문화회관 자리)앞에서 전세버스에 태워 공장으로 데려가 생산공정을 보여주고 나중에 과자를 몇종류 넣은 조그만 선물세트를 주었는데 공장전체에 퍼지던 향긋하고 달콤한 쵸콜릿 향은 지금도 생생하다.

나는 사실 이 해태 쵸콜릿에 관해서는 잊을 수없는 추억이 있다. 이 상품이 나오고 나서 해태제과에서는 대대적인 광고를 했는데 그 모델로 고 신동우 화백의 홍길동, 곱단이, 날쌘돌이가 등장했다. 상품은 50원, 30원, 10원, 5원 짜리가 있었는데 5원짜리는 쵸콜릿 코팅을 한 사탕이었다. 당시 물가를 생각하면 지금보다 훨씬 비싼 가격이었다. 아무튼 쵸콜릿을 한번도 맘껏 먹어본 적이 없었던 나는 국산쵸콜릿이 나오자마자 곧 어린 나이에 엉뚱한 결심을 하게된다. 한번 질리도록 먹어보자. 아버지 5백원만 주세요. 5백원? 어디에 쓰게? 쪼꼬렛 사먹게요. 무슨 쪼꼬렛이 5백원이나 하니? 그게 아니구요. 한상자 사서 먹어보게요.  대충 이런 대화가 오갔고, 아버지는 잠시 생각을 하시더니 선선히 오백원을 내어주셨다. 

지금으로 따지면 몇만원이 넘는, 5백원이라는 거금을 받아 50원짜리 열개들이 한상사를 사서 하나씩 까먹었다. 7개를 먹고나니 더 먹기가 힘들었다. 무슨 오기가 발동을 했는지 나머지 세개를 냄비에 넣고 녹여서 들이 마셨다. 그리고 배탈이 제대로 났다. 몇년전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거동이 불편해 지셔서 자리에 눕게 되셨다. 우리 형제들이 병문안삼아 다모인 자리에서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얘가 어려서 쵸코렛을 한박스 다먹고 쵸코렛 설사를 한 적이 있었지. 말하기도 힘들어 하시던 그 때 가늘게 웃음소리를 내며 웃으셨다. 아버지도 그걸 오십년 가까이 기억하시는 걸 처음 알았다. 당신의 어린 아들의 엉뚱한 행동에 미래에 큰 인물이 되려나 기대를 하셨는지는 알 바가 없다. 아마 아버지는 그냥 그토록 좋아하는 과자라니 사주자 이렇게 생각하신거라고 믿고 싶다. 그 아들은 훗날 큰 인물이 되지 않았고 나이를 먹어서도 변치않는 쵸콜릿 매니어로 남았기 때문이다. 다른 음식 같으면 그렇게 탈이 났으면 질릴만도 할텐데 그러지 않았으니 쵸콜릿은 그만큼 위대한 음식인가 보다.

이야기는 다시 여섯살로 돌아가서, 나랑 친하게 놀던 향기가 여덟살이 되어서 국민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더니 변했다. 학교 친구들하고 어울려 놀기 시작하면서 그녀는 나를 대하는게 예전같지 않았다. 내가 좀 무시를 당하는 것 같기도 했다. 어린 마음에 생각했다. 이게 다 학교를 안다녀서 그런거다. 오냐, 학교를 다녀주마. 그리고 엄마를 졸랐다. 학교 보내달라고. 너는 나이가 두살이나 모자라는데다가 몸도 약해서 안돼라는 설득은 통하지가 않았다. 단식에 들어갔다. 기억은 확실하지 않지만 단식이래야 간헐적으로 투정을 부리는 몇끼였겠지. 

세월이 어수룩하던 시절이어서, 어머니가 학교에 가서 어떻게 하셨는지는 모르지만 나의 희망은 관철되었다. 남들보다 한 달 반 늦은 4월 중순 어느 따스한 봄날, 나는 내 등짝보다 훨씬 큰 란도셀을 메고 첫 등교를 하였다. 새교사를 짓고 있어서 얼마간은 천막교실에서 가마니를 깔고 공부를 하다가 새로지은 목조건물로 이사하였다. 아이들은 고사리같은 손으로 나무바닥에 치자가루를 바르고 콩기름을 먹이고 하는 일들을 하였다. 지금 생각해보니 방과후 청소도 상급생 언니들이 해주는 판에 일학년 아이들이 마루바닥에 기름먹이는 일을 해낼 수 있을리가 만무했다. 우리가 공부하는 교사는 우리 손으로 가꾼다는 의식을 심어주기 위한 상징적 행사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성공적이었던게, 바로 이 글을 쓰기 직전까지 나도 오십여년동안 아이들이 새로지은 교실의 마루바닥을 자기손으로 기름을 먹였다고 믿고 살았으니까. 

나는 다음해 이학년으로 진급한 뒤 이내 몸이 안좋아졌다. 결핵이었다. 나이도 어리고 체력이 약한 아이가 무거운 책가방을 메고 학교에서 먼지를 마시고 그런게 다 부담으로 왔던 것이다. 그래서 소설에 나오는 것처럼 나는 나이드라짓드인지 무슨 파스인지 하는 결핵약을 잔뜩 챙겨 공기좋은 시골로 일년동안 요양을 가게된다. 일학년을 다니는 동안 여러가지 일들이 있었지만 지금도 소풍가는 날 비가 와서 연기되어 속상해 하던 일, 무슨 날이었는지 도시락을 싸간 날, 그리고 신발을 왼쪽 오른쪽 제대로 구분하여 신을 줄 알게되어 칭찬받은 날 등이 기억에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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