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으 음식일기(20): 사라져버린 계절, 김장철 나의 반백년 음식일기

해마다 이맘때가 김장철이었다. 날씨가 갑자기 추워지니 공기속에서 겨울의 내음이 난다. 그리고 마음은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 

김장을 하는 날 방과후 집에 돌아오면 대문을 열면서부터 집전체에 싸한 냄새가 돌았다. 마루에 올라서면 김치담근 냄새가 코뿐이 아니라 눈에도 와닿았다. 그 때는 몰랐지만 아마도 곳곳에 배어있던 마늘의 아린 성분이 각막을 자극하였던 것일게다. 파와 무도 채를 썰고 갈고 하면 아릿한 휘발성 기체가 나온다. 고추도 재채기가 나오는 매운 냄새가 있으니 이런 향신채를 대량으로 사용하는 김장날엔 집안에 한동안 이런 모든 냄새가 범벅이 되어 곳곳에 배어드는게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게 싫지가 않았다. 그 때는 참 많이도 했다. 백포기는 보통이고 좀 산다는 집은 이백포기 삼백포기 이렇게 했다. 

지금은 사어 비슷하게 되어버렸지만 '월동준비'라는 말이 있었다. 말그대로 겨울을 날 준비를 한다는 뜻이다. 가을이 깊어지면 단풍과 낙엽의 낭만도 잠깐이고 어른들에게는 이내 겨울맞이가 걱정으로 다가왔다. 신문에도 월동준비를 위한 기사가 매일 실렸다. 수도나 펌프가 얼지 않도록 파이프를 싸매둘 것, 외풍이 심한 집은 비닐을 바르고 문풍지를 새로 대고 등등 한파를 피하는 요령같은게 눈에 띄었다. 스티로폼 같은 것도 없어서 헌 담요같은 걸 수도파이프에 두르던 시절이었다. 집장사들이 날림으로 지은 집들이라 방한도 매우 엉성했고 수도도 낮게 묻혀서 추운날이면 얼고 또 그래서 터지곤 했다. 더 심각한 건 연탄가스 중독이어서 해마다 겨울이면 인명피해가 많이 났다. 사고에 대비해서 연기나는 걸 아궁이에 때서 틈이 벌어진 구들과 장판을 보수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다.

이런 월동준비에서 제일 중요한 것 중에 하나가 김장담그기였다. 그 때는 겨울이 오기전에 김장을 수백포기 넉넉하게 하고, 연탄을 수백장 광에 들여 쌓아놓은 집은 걱정이 없겠다고 부러워하는 집이 그렇게 할 수 있는 집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다. 누구네는 돈을 마련하지 못해서 김장을 제때 못하고 쩔쩔매다가 날씨가 갑자기 추워져서 땅이 얼어서 김장독을 파기가 어려웠네 이런 이야기도 흔하게 들렸다.    

지금은 담근다는 동사를 더 많이 쓰지만 그 때는 김장은 '하다'라는 동사를 썼다. 김치도 담그고 깍두기도 담그고 오이소박이도 담근다고 하는 건 지금이나 그 때나 마찬가지지만 김장은 '한다'는 말을 썼다. 김장날 잡았나요. 네 우리는 다음주에 해요. 몇포기 하세요. 그냥 작년만큼 하려구요. 이런 대화들이 친지나 이웃간에 오갔다. 통배추를 백포기 이상 하루에 담그는 작업은 많은 일손을 필요로 했다. 그래서 이웃, 동창들이 돌아가며 품앗이를 하는게 풍습이었다. 주부들이 여럿모여 절인 배추와, 무채와 각종 젓갈과 고추가루, 다진 마늘, 파 등을 그야말로 산더미같이 쌓아놓고 김장을 하는 광경은 아이들이 보기에도 푸근하고 넉넉했다. 

일을 도와주러 온 손님들에게 점심을 대접해야 하니 어느집이나 김장날은 평상시와 달리 맛있는 음식을 더 마련하였고, 주부들은 즐겁게 이야기도 나누고 밥도 맛있게 먹으며 김장을 하였다. 대개 작업은 오후 늦기전에 끝났다. 다들 또 각자 집에 돌아가서 자기네 저녁준비를 해야했으니까. 그리고 저녁에 집에 돌아온 식구들도 김장을 한 날 저녁은 참으로 푸짐하고 맛있게 먹었다. 평소보다 많이 장만한 음식에 더해 오늘 담근 생김치나 배추사이에 넣고 남은 김치속을 여분으로 마련한 생굴과 함께 맛보는 것도 즐거움의 하나였다. 



내가 어렸을 때 김장철이 되면 평소보다 엄청난 양의 배추와 무가 대도시로 올라오는 걸 재래 시장에서 다룰 공간이 없어서 동네마다 공터나 이런 곳에 임시로 김장 시장이 열렸다. 공터를 가득 메운 배추와 무의 산더미에서 풍기는 풋풋한 야채냄새가 진동하는 김장시장에는 흥분한 아이들도 괜히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아이들이란 일상에 조금이라도 변화가 오면 흥분하는 법이니까. 주부들이 와서 배추와 무를 구입하면 지게와 리어카 등으로 그걸 날라주는 짐꾼들이 따로 있었다. 저녁전에 파장할 무렵이면 떼어낸 초록색 배추 겉이파리와 무청 등이 길바닥에 지저분하게 널려있었다. 그걸 닭모이로 쓰고 토끼먹이로 쓴다고 모아가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서울에도 닭을 키우고 메추리, 토끼를 키운 집이 제법 되지않았나 싶다. 

그리고 서울에도 김장철이면 소달구지, 마차가 흔하게 눈에 띄었다. 마차를 끄는 건 말보다는 다리가 굵은 노새가 많았다. 말이나 소가 짐을 부리는 동안 눈을 껌뻑이며 서있었는데 참 똥도 많이 쌌던게 기억에 남는다. 농촌의 아이들하고 달리 그래도 서울서 산다고 그게 신기했던지 아이들은 둘러서서 야, 저기 또 똥싼다, 뿌지직 뿌지직 참 많이도 싼다, 낄낄거리며 구경을 했다. 

그 때는 건축붐이어서 내가 살던 부근의 정릉천에서는 개천모래를 파서 시멘트를 약간 섞어 벽돌을 많이 찍어냈는데 이것도 마차가 많이 날랐던 것 같다. 흔하게 보이던 소달구지와 마차가 소리소문없이 도시의 풍경에서 사라져버리고, 툭하고 건드리면 뒤집어 질 것 같은 조그만 삼륜자동차가 나와서 용달업무를 대체하였다. 용달차라고 불리던 이 삼륜차는 오토바이소리를 내며 시내를 누비고 다녔는데, 내가 현장을 목격한 적은 없지만 실제로 자주 엎어지기도 하였다고 들었다. 서울역, 청량리역, 마장동 이런데서 화주를 기다리던 지게꾼들도 이즈음 자취를 감춘게 아닌가 싶다.    



위의 흑백사진 세장은 국가기록원 홈피에 공개한 사진을 캡쳐한 것인데 내가 어렸을 때 서울에서도 김장철이면 흔하게 보던 풍경이다. 미국 LA나 뉴욕에서는 50년대 60년대 영화를 찍을라치면 그냥 길에 다니는 자동차만 바꾸면 그대로 카메라를 들이대도 될 법한 곳이 곳곳에 많고, 파리 런던은 더욱 그렇다. 위의 사진을 보니 거기에 비하면 참 한국인들만큼 변화무쌍한 세월을 살아낸 민족도 드물지 않나 새삼 감회가 새롭다.

김장하는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나는 어려서 고향 속초에서 김장하는 것도 볼 기회가 있었다. 배추를 절이는 작업을 바닷물에서 했다. 소금물에 담그는게 아니라 집집마다 소달구지에 배추를 잔뜩싣고 바닷가로 향했다. 소금살 돈을 조금이라도 아끼려고 그랬던 것 같다. 두부를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파는 주부들은 돌아올 때 동이를 머리에 이고 바닷물을 담아오곤 했다. 응고제로 간수를 내는데 돈을 아끼려고 바닷물을 길어다 썼던 것이다. 손쉽게 화학약품을 쓰다가 다시 요새는 바닷물을 써서 만드는 두부가 명품두부 취급을 받으니 세상은 돌고돈다. 그 때 부업으로 두부를 만들어 팔던 마을에서 몇 집이 남아서 지금 학사평의 순두부마을이 되었다. 아무튼 나는 서울과 시골을 오가며 김장을 다 먹어보았는데 솔직히 이야기해서 아무래도 도회지에 사는 조금이라도 살림이 넉넉한 집들의 김장이 가난한 농촌의 그것보다는 더 맛있었던 것 같다. 

요즘 TV를 보면 무슨무슨 부녀회같은 단체의 봉사활동으로 대량으로 김치를 담그는 모습이 나오기도 하고, 깨끗하고 위생적인 시설에서 김치를 만드는 김치공장의 모습도 나오곤 한다. 내가 이 모습을 보면서 제일 눈에 띄는게 모든 사람의 두 팔에 착용된 빨간 고무장갑이다. 옛날엔 그런게 없었다. 배추를 절이고, 속을 버무리고, 무채를 썰고, 속을 버무리고, 그걸 배추사이에 넣고 하는 작업을 다 맨손으로 했다. 어릴 적에 엄마 옆에서 잠을 청하는데 김치를 담근 날이이면 불그레 물이 든 어머니의 손길에서 맵고 알싸한 양념냄새가 났던 기억이 남아있다. 

요즘말로 하자면 '국민여배우'라 해도 당연할 한국 최고의 미녀로 통하던 김지미씨가 열살 연하의 젊은 가수 나훈아와 결혼을 하여 엄청난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대전 어딘가에서 살림을 차리고 동거를 하다가 언론에 포착이 되어 특종거리가 되었는데 나도 당일 그 기사를 보았다. 제일 인상적이었던 내용이 김지미가 김치도 직접 담그는데 고무장갑을 끼지 않고 맨손으로 담근다는 대목이었다. 그건 여러가지를 의미했다. 그 예쁜 여배우 김지미가 보통사람처럼 김치도 담가먹고 살림도 잘하는구나, 좋아하는 남자를 위해서 고무장갑을 끼지않고 김치를 담근다니 진짜 사랑하는 사인가 보다 등등. 자칫 잘못하면 부정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두사람의 관계는 아마 이 감동적인 '맨손김치' 이야기가 있어서 세간의 축복을 받지 않았나 추측해 본다. 아마도 당시는 고무장갑이 보급되기 시작한 무렵이어서, 고무장갑을 끼고 하는 작업에 대한 위화감이나 불신이 좀 남아있었기에 김치는 역시 맨 손으로 담가야 제맛이 나온다는 믿음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고 보니 고무장갑이 보급될 무렵을 전후하여 전국에 보급되기 시작한게 뻘건 고무다라이다. 지금은 그게 없으면 한국의 모든 식당은 가동이 중지될 것이다. 주방을 들여다보면 배추도 절이고, 식재료도 담고, 비눗물을 풀어놓고 씻을 그릇을 담가놓기도 하고 별별 용도로 다 쓰인다. 그런데 지금 보아도 여전히 정이 가는 모습이나 색깔은 아니다. 옛날에는 나무로 만든 함지박을 썼다. 몇년전 뉴욕의 어느 서양 레스토랑에 갔는데 함지박을 멋드러지게 인테리어 가구로 장식해 놓은 걸 보았다. 선견지명이 있는 사람이 과도기에 전국을 돌아다니며 함지박을 고무다라이와 바꿔서 나중에 그걸 외국에 안티크로 팔아 크게 한 몫 잡았다는 도시전설이 있는데 사실여부는 모르겠다. 

그즈음 바가지도 슬슬 고무바가지로 바뀌기 시작했다. 새마을 운동 지붕개량사업으로 초가지붕이 없어져서 박을 키우지 못해 바가지 생산이 끊겼는지, 고무바가지가 보급이 되어 진짜 바가지는 개그프로그램에서 머리를 내리치는거 말고는 수요가 없어져서 박을 안키우게 되었는지, 사실여부는 알 수가 없는데 어쨌거나 지금은 그 고무바가지 마저도 없어져 버렸다. 쌀에 돌이 들어있지 않으니 조리도 사라져버렸고 참 없어져 버린게 많기는 많다. 

김장을 할 때 남자들이 해야 할 일이 있으니 마당이나 뒤란에 땅을 파고 김치독을 묻는 일이 그것이다. 김장독을 묻고 거기에 김치를 차곡차곡 넣은 뒤 커다란 돌멩이를 씻어서 눌러놓고 항아리 뚜껑을 덮고는 그위에 가마니를 덮어놓으면 익기를 기다리는 일만 남는다. 김장독을 여러개 묻으면 꺼내먹는 순서에 따라 소금을 더해서 염도를 좀 달리했던 것도 같은데 어릴 적에 구경만 했으니 자세하게는 알 길이 없다. 

난동(暖冬)이라고 해서 겨울이 유난히 푸근한 해는 김장김치가 빨리 시어서 전국의 가정이 아우성이었다. 봄이 와서 푸성귀가 날 때까지는 김치를 먹어야 하는데 시어버리면 참으로 난처한 노릇이었다. 김치찌개를 주구장창 끓여먹기도 하고 만두도 빚어먹고 전도 부쳐먹고 그랬지 싶다. 

어머니는 음식솜씨가 좋기로 유명했다. 유명하다고 해봐야 친척들 사이에서, 그리고 동창들 사이에서 정도였겠지만 나는 그게 참으로 자랑스러웠다. 우리집 김장김치는 유달리 맛있기로 소문이 나서 집에 오신 손님들이 몇포기씩 얻어가고는 했다. 어머니는 인심좋게 싸주시면서도 한편으론 안타까워 하셨으니 그건 김치가 독에서 나오면 금세 맛이 변하기 때문이라 했다. 우리집에서 얻어가면 빨라야 몇시간은 지나서야 자기네 집에서 맛을 볼테니, 어머니로서도 맛이 변해버린 김치맛을 당신의 김치맛이라고 누군가 오해하는게 자존심상 탐탁치 않았을 것이다. 

해마다 그랬는지는 모르겠는데 우리집은 어떤 독에 담는 김치에는 배추잎 사이에 생태를 숭덩숭덩 잘라서 넣은 적이 있었다. 배추잎 사이에서 잘 익은 생태를 너무 맛있어 하며 식구들이 먹었던 것 같은데 나는 별로 내키지가 않았던 맛이었다. 지금 같으면 술안주로 환상의 맛이었을 것 같은데. 김장을 하면 배추김치만큼이나 맛있었던게 큼직큼직하게 썰어넣은 무다. 이게 잘익으면 고소하고 시원하기가 비길데가 없이 훌륭한 맛이었다. 점심에 뜨거운 물에 찬밥을 토렴하고 이 무를 젓가락 한짝으로 쿡찍어 한 입씩 베어먹으면 다른 반찬이 따로 필요가 없었다. 

추운 겨울날 독에서 갓꺼내온 김치는 얼음이 살짝 끼어있을 때도 있었다. 이빨이 약간 시릴 정도의 김치를 몇입 먹다보면 방안의 온도에 김치가 알맞게 녹아서 제맛이 돌기 시작한다. 한없이 밥을 먹을 것만 같았던 맛있는 김장김치의 맛이지만 나는 중학교 2학년 겨울을 끝으로 김장과 멀어지기 시작한다. 지독한 편식을 하였던 내가 겨울만 되면 명란젓으로 망명을 하여 외국에 나가기 전까지 몇년동안은 겨우내내 그것만 먹고 살았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맛있는 명란젓도 사라지고 맛있는 김장도 먹기 힘든 세상이 되었다. 내주변에 사랑하는 이들, 특히 쥬스와 우유에게 내가 먹고 자랐던 맛있는 김장을 먹여주지 못하는게 미안하고 안타까울 따름이다.                  


세상이 망할 것 같지만 한국에 희망을 건다; 2016.11.20 살아가는 이야기



자꾸 4년전이 생각난다. 될성부른 나무가 되기는 아예 글렀다고 진작에 떡잎부터 알아보았다. 이성적인 판단력을 가진 수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떡잎이 선거에서 이겨버렸다. 그런 후보를 선택한 절반의 유권자가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아니, 그의 실체를 잘모르고 선택한 사람은 원망스러웠고 알고도 자신의 이해관계로 그를 선택한 사람에게는 저주를 퍼붓고 싶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결과가 그렇게 나왔는데. 기도하는 마음으로 싹수부터 노란 그 떡잎이 좋은 나무로 잘자라기를 축원하였다. 나라를 이끌어갈 대통령이란 중차대한 책무를 맡았으니 성공을 빌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러고는 자기부정을 하기 시작하였다. 내가 편견에 사로잡혀 사람을 잘못본 거겠지. 선입견에 부정적으로만 본거지 거기까지 올라갈 때에는 뭔가 있지 않겠나. 그가 나라를 위하여 제대로 봉사한 대통령이 된다면, 나 하나가 속좁고 판단력마저 없는 일개 시민이 된들 어떠리 하는 마음으로 내가 틀렸기를 진심으로 바랬다. 

그리고 세월이 4년 가까이 흘러 지난 10월말부터 엄청난 사태가 터졌다. 믿기 힘들고 또 그게 엄연한 팩트라 수치심과 분노에 견디기 힘든 사실들이 보도를 통해 매일 하나씩 까발려지기 시작했다. 지난 4년동안 도통 납득이 안가던 숱한 정부의 정책과 조치에 대한 의문도 단숨에 풀렸다. 그런데 너무도 허탈했다. 의문을 풀어준 그 열쇠가 '국가권력을 쥔 것들이 사리사욕을 채우기에만 급급한 시정잡배에 지나지 않고 심지어는 정상적인 사고능력조차도 결여된 인간이 대권을 행사하였다'라는 사실이었기에 패닉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4년전 2012년 12월 19일 밤, 박근혜후보가 대통령이 되어서는 절대 안되고 그를 옹립하여 집권을 연장하려는 세력이 계속 권력을 쥐어서는 더더욱 안된다고 믿었던 이들은 야당의 승리를 확신하는 분위기였다. 성향이 비슷한 우리들은 개표방송을 함께 보며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는 기쁨을 즐기려고 일산의 맥주집에 모여있었다. 

땡, 하고 여섯시 시보가 울리면서 각방송이 출구조사를 발표하였다. 뭔가 잘못되었다. 잠시 모두가 멍하니 있다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모든 방송이 일제히 박근혜후보가 근소한 차이로 승리를 예상하는 출구결과를 보도하며 개표방송을 시작하였다. 그나마 한군데의 출구조사가 문재인의 승리를 예상하여서 일행들은 거기에 기대며 결과를 지켜보았다. 그러나 박근혜가 이긴다는 예상은 한번도 뒤집어지지 않은채 개표가 진행되었다. 성질 급한 이들이 쌍욕을 하면서, 탈진해서 기력이 안되는 이들이 한숨을 내쉬며 자리를 뜬 뒤, 밤 열시였던가 열한시쯤 우리는 부근 삼겹살집으로 자리를 옮겨 통음을 하며 서로를 달랬다. 

술이 조금 들어가면서 숨이 넘어가는 동물처럼 괴성을 지르는 이도 있었고 아이처럼 엉엉 우는 이도 있었다. 나는 저따위 것(더 상스러운 표현으로)에게 표를 던진 유권자가 절반이 넘는 나라가 싫고, 한국인이라는게 부끄러워요, 하고 가게에 있는 다른 일행들에게 고함을 치는 이도 있었다. 아무도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형용하기 어려운 절망감을 비명으로, 눈물로, 고함으로 표현하는 이들이 더 감성적이고 솔직했을 뿐이지 그날 거기있던 누구나 겉으로 표현만 안했지 절망을 넘어선 분노를 안고 있기는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새벽에 집에 들어와 자고 늦은 아침에 일어나서 혹시 세상이 망하지는 않았나 해서 TV를 켰더니 온통 새로 당선된 이의 얼굴로 화면이 가득 찼다. 얼른 끈 뒤에 그로부터 한동안 TV도 안보고 신문도 보지않았다. 인터넷뉴스도 피해다니며 읽었다. 선거날로 부터 이틀뒤 마야문명이 사용하던 캘린더에 근거하여 세상에 종말이 올지도 모른다던 2012년 12월 21일도 망하지 않고 지나갔다. 

나는 헝클어진 몸과 마음을 추스리고 살아야지, 마음먹고 모든걸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노력하였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내가 사람을 잘못보았을 수도 있고, 내판단이 틀릴 수도 있을거야, 주문처럼 외었다. 내가 믿었고 옳다고 생각했던 신념과 팩트가 무너지더라도 나라가 잘되는게 좋은거니까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면 나라가 망할 거라는 나의 판단이 틀리기만을 바랬다. 그때 쓴 포스팅의 일부분이 다음 구절이다. 제목이 '2012.12.22 세상은 망하지 않았다: 김치찌개와 볶음밥'이었다.

(전략)...리고 제가 투표했던 후보는 당선되지 못했습니다. 그가 선거에서 이길 것을 희망했고 또 이길거라고 믿고있다가 막상 다른 결과가 나온 것을 보고 상당히 당황했습니다. 그리고 허탈감에 빠졌습니다. 그 후유증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탓인지, 아직까지 TV뉴스도 신문도 보지않게 되고, 인터넷 포털에 뜨는 뉴스도 국내정치관련 헤드라인은 피해서 클릭을 하게 됩니다. 

제가 그동안 이 블로그에서는 웬만하면 정치적인 내용을 다루지 않으려고 해왔습니다. 앞으로도 가능한 한 그러려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예외로 이렇게 정치이야기를 한마디하고자 합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소대로 포스팅을 올리는게 제 스스로에게 힘들게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이 2010년 8월 31일 이라크전 종료를 선언하면서 했던 연설가운데 인상깊은 대목이 있습니다. "...오늘 오후에 나는 조지부시 전대통령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와 내가 이 전쟁에 대하여 애초부터 의견을 달리했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의 나라사랑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습니다. 말씀드렸듯이 그동안 이 전쟁을 지지했던 애국자들과, 이 전쟁에 반대했던 애국자들이 있었을 따름입니다. 이제 모두 하나가 되어..."

우리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에 2번을 찍은 사람들과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에 1번을 찍은 사람들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와 다른 후보에 표를 넣은 쪽은 사리사욕이 앞서서 아니면 철이 없어서 또는 무식해서 등 어떤 이유로든 비난과 원망이 계속된다면 분열의 골은 깊어져만 가겠지요. 저는 야권이 통합하여 내세운 후보가 훌륭한 대통령이 될 것으로 굳게 믿고 투표를 하였지만, 이번에 당선된 후보도 좋은 대통령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용맹한 장수가 똑똑한 장수만 못하고 똑똑한 장수는 덕있는 장수만 못하지만, 덕있는 장수도 복있는 장수만은 못하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부디 다음 대통령은 복이 많았으면 좋겠다고 바라면서 일상으로 돌아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후략) 

사람은 세월이 흘러가면서 과거의 사실을 나중의 경험으로 덧칠을 하여 잊고 있거나 잘못 기억하는 경우가 왕왕 있는 법이다. 위의 글을 읽으니 또렷이 생각이 난다. 나와 주의의 사람들은 이미 박근혜라는 사람이 똑똑하기는 커녕 지능과 지성이 많이 모자르고, 게다가 덕이 있는 사람도 아니라는 걸 잘알고 있었던 거다. 그래서 그가 대통령이 되어서는 절대로 안되는 인물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니 지성도 없고 덕성도 없는 사람이 성공할 방법이라고는 그런 부족함을 덮고 남을만큼 타고난 복이 아주 아주 많은 것 말고는 없었다. 그래서 그 엄청난 복으로 훌륭하게 대통령직을 수행하기를 바랬던 것이다. 

4년이 지난 요즈음 철저하게 반성하게 되었다. 세상에 바래선 안될게 공짜나 요행이라는 사실을. 

세상에는 늘 사람들의 비관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이용하여 먹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여기에 흔들리지 않기로 하였다. 미국에서도 사람의 증오와 이기심등 부정적인 면을 선동한 희한한 사람이 대통령으로 뽑히고 이런 조짐은 세계곳곳에서 보이고 있다. 지진이 나지 않던 나라에서 지진이 잦아지고 있다. 프랑스, 한국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세계적으로 대지진이 온다, 화산이 터질 것 같다, 원전사고가 언제 어디서 나도 이상하지 않다, 중국의 경제동향이 심상치 않다, 등등 비관할 내용은 차고 넘친다.  

한국이 직면한 사태는 천하장사 씨름판이 아니라서 한판에 뒤집기로 시원하게 해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9회말 만루홈런 한방으로 시원하게 역전할 수 있는 야구게임이 아니라는 얘기다. 그런 의미에서 이 정권은 국민들에게 제대로 민주화 산교육을 시키고 있는 것 같다. 수십년 쌓인 '적폐'의 상징인 대통령과 그 바탕에 깔린 신화를 역사에서 털어내고 민주주의를 뿌리내리려면 수백만이 모인 촛불 시위 몇번으로는 모자르다. 대통령이 하야를 하거나 탄핵을 당하더라도 이만하면 됐다고 긴장의 끈을 놓아서는 안된다. 끈기를 가지고 끝까지 지켜보고 올바른 일을 하는 이들에게 힘을 실어주어야 나라가 바로 선다. 

나는 먼길을 나서는 나그네가 신발끈을 단단히 조여매는 심정으로 일상을 계속하기로 하였다. 맛있는 밥도 먹고 블로그도 하던대로 틈틈히 하겠다는 말이다. 단, 긴장의 끈은 놓지 않은채. 

맛있게 라면을 끓여먹고 지지난주 광화문에 나갔다. 이렇게 대규모 시위에 나가보긴 수십년 만이다. 

지난주 백만집회는 밖에 있어서 TV로 중계를 보았고, 어제는 선약이 있어서 끝까지 못있고 오후 늦게 잠깐 출첵하는 의미로 발도장만 찍었다. 볶음밥을 맛있게 후다닥 해먹었고.
 
오늘은 느즈막히 일어나 햄버거를 시켜먹었다. 그리고 이렇게 블로그를 쓴다. 우리나라의 장래에 희망을 본다. 그러나 요행을 바라지는 않을거다. 밥은 맛있게 먹되 술은 좀 줄이는게 좋다고 생각한다. 정신 바짝차려야지.  

   

하루에 영화두편, 저녁도 두번... 밥과술네 집이야기


직장에 다니는 여성이 아이들에게 장난감을 충동적으로 마구 사준다거나 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아주 오래전 어렸을 적에 집에 굴러다니던 여성지에서 읽었지 싶습니다. 지금 대충 기억해보면 직장에서 일하는 여성은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는 미안함을 풀기위해 퇴근후에 돌아와 아이를 만나면 과다한 애정표현을 한다거나 절제없이 장난감을 충동적으로 사준다거나 하는 경향이 있다, 뭐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당시에는 결혼을 하고 일하는 여성이 지금보다 훨씬 적던 시절이라 요새와는 상황이 달랐을 수도 있겠지요. 아무튼 그 때 그런 기사를 읽고 어린 마음에 엄마가 일하는 가정의 아이들이 마냥 불쌍하기만 한 건 아니라고 동정을 약간 거두어 들였던 기억이 납니다. 거의 모든 가정에서 어머니란 늘 집에 있는 존재였고, 또 있어야 하는 존재로 여겨지던 시절 이야깁니다. 

가난해서 더욱 그랬는지, 전반적으로 독서에 대한 열망은 높았고 책을 많이살만큼 경제사정은 따라가지 못해서 잡지구독이 더 왕성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이들은 어깨동무, 새소년, 중고생은 학원, 주부들은 주부생활, 여원 등을 사는 집이 많았습니다. 가장 서민적인 잡지는 '샘터'였는데 작지만 포근한 내용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여성지는 신년호에 호화가계부가 부록으로 붙어나와서 1월호만 사는 집이 대단히 많았습니다. 이야기가 엉뚱한 곳에서 시작이 되었는데, 오늘 어제 있었던 일을 생각하다가 튀어올라온 기억의 조각이라 적어보았습니다. 이제부터 왜 워킹맘과 장난감 이야기가 생각났느냐를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어제는 일요일. 집에서 딩굴거리는 사람이 둘 있었습니다. 출장하나가 캔슬되어 모처럼 시간이 팡팡나는 일요일을 보내던 밥과술과 중간고사도 끝났겠다 느긋하게 쉬어보자던 밥과쥬스 이렇게 부녀 둘을 말합니다. 하루종일 TV를 켜놓고 혀도 끌끌차다가 아이고 저것들 아주 싹쓸이를 해야하는데 하고 화도 내다가 이러면서 채널을 돌리며 부녀는 잡담을 나누는 중입니다.

쥬스: 아빠, Jtbc 말고는 생전에 안보던 종편을 보시네요. 그것도 티비조선을 ㅋㅋㅋ
술: 그러게나 말이다. 나도 내가 이렇게 될 줄 몰랐다. 그래서 뭐든 장담할게 못되나봐. 얼마나 갈진 모르지만 ㅋㅋ
쥬: 요새 며칠은 너무 돌아가는게 빨라요.
술: 우주의 기운이 모이면 그렇게 된단다.
쥬: 근데 어떻게 저딴 사람들이 국가를 갖고 놀게 내버려뒀지?
술: 집권층의 혼이 비정상이라 그런거지. 넌 금요일 시위 재밌었어?
쥬: 너무 평화적이고 모든 사람들이 열정에 차있는데도 차분해서 감동적이었어요. 
술: 이미 저쪽이 기가 꺽인 거야. 저 편이 폭력적이면 이쪽도 악에 바치게 되니까.

이야기는 시위이야기, 한국민으로 더할 나위없이 쪽팔리게 된 시국 이야기, 앞으로의 전개에 대한 전망과 예측 등으로 옮겨가다가 새로운 뉴스거리가 안나오자 사생활로 옮겨갑니다.

쥬: 오늘 영화 안볼래요? 
술: 영화? 좋지. 뭐 볼까?
쥬: 럭키도 재밌다고 하고, 인페르노도 보고 싶고.
술: 나도 그러네. 어떻게 하지?
쥬: 두 개 다 볼까?
술: 콜! 그럼 용산에 아이폰세븐 주문해 놓은거 찾고 그김에 보면 되겠다.

해당 영화 두편의 시간을 보니, 용산CGV에서 저녁 7:10 하고 9:00시에 각각 있어서 부지런히 옆관으로 이동하면 아슬아슬 시간이 맞을 것 같았습니다. 저녁은 끝난 뒤에 먹기로 하였지요. 평소에 시간이 별로 없어서 보고싶은 영화를 하루에 두 편 몰아보는건 자주 있는 일이라 이상할 것도 없습니다만, 주차확인을 3시간 밖에 해주지 않는게 불만이었습니다. 차를 넣다가 뺄 시간이 없어서 나올때 눈물을 철철 흘리며 9천원이라는 거금을 내야했습니다. (관계자분 계시면 이어서 두편 세편 보는 사람들을 위해서 어떻게 해주세요. 그럼 자주 갈께요 엉엉)  

유해진도 보고 탐행크스도 보고 만족해서 나오니 배가 마구 고파지는 두사람이었습니다. 
술: 너 뭐 먹고 싶니?
쥬: 굽는 고기가 먹고 싶어요.
술: 소? 돼지?
쥬: 소, 양, 돼지 다 좋아요. 굽는 거면.

일요일 밤 11시가 훨씬 넘어서인지 24시간 하는 식당도 많이 문을 닫았더군요. 홍콩반점, 짬뽕타임, 새마을식당 같은 곳도 일요일은 밤 9시에 문을 닫는다는 건 알고 있었지요. 열었겠지 하고 찾아간 백정도 아, 죄송합니다 마감입니다라는 친절한 멘트로 문전에서 저희를 돌려보냈습니다. 이곳저곳 다니며 양꼬치집, 포장마차, 곱창집 등을 간을 보다가 새로 생긴듯한 돼지국밥에 밀면을 하는 집이 있는 걸 발견하고는 그리 들어가기로 하던 참에 정말 우연히 바로 옆에서 고기를 굽는 집을 찾았습니다. 

들어가 앉아서 저희 집에서는 이거 많이 드세요, 하고 추천받은 메뉴가 각종부위 모듬입니다. 메뉴에는 2~3인분이라고 적혀있으니 문제될게 없는 부녀2인 입니다. 바로 이게 그 메뉴입니다. 



벌건 숯불위에 쥬스가 좋아하는 차돌박이부터 시작해서 꽃등심, 안창살 순으로 구워먹기 시작했습니다. 아, 맛있어 얌냠. 술은 클라우드에 참이슬, 늘 선호하는 조합으로 시켰지요. 



사단은 슬슬 안창살을 구우면서 서비스로 나온 된장찌개에 밥한그릇 시켜서 입가심으로 나눠먹으면 되겠다 싶었을 때 났습니다. 공기밥 하나 주세요, 하는 주문에 서빙하는 분께서, 죄송합니다. 일요일 밤이라 밥이 떨어졌어요. 우동은 됩니다, 라는 정중한 설명을 들었습니다. 아니, 밥이 떨어지다니 여기가 덴마크 식당도 아니고... 그래도 인품이 있는 두 사람이라 그래 밤 한시에 밥이 떨어질 수도 있지, 맛있게 고기라도 먹었으면 됐지하고 얌전히 체념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안된다고 하니 밀가루 탄수화물이 아니라 하얀 이팝의 탄수화물 결핍증이 심하게 밀려왔습니다.


이 때였습니다. 이런걸 찌찌뽕이라고 하나요? 두사람의 눈이 동시에 반짝하고 빛났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입을 열기를, '밀면, 돼지국밥...'  야심한 시각에 두군데에서 밥을 먹겠다는 야무진 생각, 사실 그 순간에는 커피여사에게 들키지 않게 무덤까지 가져가려 했습니다. 한자성어에 '천망회회 소이불루(天網恢恢 疏而不漏)'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늘이 친 그물은 엉기성기 코가 넓은 것 같아도 하나도 빠져나가지 못한다는 뜻이지요. 요즈음 사태를 보니 세상에 영원히 묻히는 비밀은 없다는 진리가 생각났습니다. 우리도 일단 맛있게 먹고 자수를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미련한 건지 모르겠는데 배불리 먹고 또 다른 식당을 들어가니 묘한 쾌감이 들었습니다. 일단 앉아서 밀면하고 돼지국밥을 시켰습니다. 소주도... 먼저 반찬이 나오고 밀면과 국밥이 순서대로 나왔습니다. 


aaa


쥬스는 밀면을 먹기 시작했고, 술은 하얀 맘마를 그냥 떠서 한 숟갈 입에 넣고 깍두기 한 알을 함께 씹으니, 천국이 따로 없었습니다. 


결정적인 건 아래 사진입니다. 국물이 적당히 밴 국밥 한술... 그토록 사무치던 쌀밥의 위력은 국물과의 콜라보에서도 유감없이 발휘 됩니다. 


전반전이 끝나고 후반전에 들어가기 전 휴식시간에 부녀는 그릇을 바꿔 상대방의 밀면과 돼지국밥을 맛본뒤 다시 자기 메뉴에서 마무리를 짓습니다. 아래사진이 밥과술의 엔딩컷입니다. 새우젓해서 들어간 고기를 안주삼아 소주를 홀짝홀짝 마신 건 음식에 취해, 술에 취해 사진이 없습니다.



망가질대로 망가졌던 나라를 국민의 힘으로 이제 다시 추스리고, 국제적으로도 있을수 없는 망신을 당했던 나라의 위신이 다시 설 수 있는 기회가 온다고 생각하니 밥맛이 살아나서 한번에 두끼 식사를 거뜬히 하였노라, 고 말한다면 이건 시국에 묻어가는 변명이구요. 앞으로는 이러지 말자고 반성하면서 부른 배를 쓰다듬으면 집으로 돌아온 밤이었습니다. 

끝으로 밝힙니다. 왜, 워킹맘과 장난감의 이야기가 생각났는지. 저는 솔직히 고백하건데, 하루저녁에 두끼를 먹은 적이 여러번 있습니다. 외국으로 많이 나다니다보니 한식에 대한 애정이 과다하여, 들어오면 이것도 먹고 싶고 저것도 먹고싶고 해서 결국 이곳 저곳을 옮겨다니며 먹은 적이 몇번 있더라, 뭐 그런 이야기입니다. 앞으로는 다신 안그러리라 마음먹었습니다...
 


나으 음식일기(19): 멕시칸사라다, 명동에 흐른 세월 나의 반백년 음식일기


야, 너 피자파이라고 먹어봤니? 그저께 사촌형이 명동 코스모스백화점 지하 양식집에 가서 사줬는데 되게 맛있더라. 어떤건데? 그러니까 파삭파삭한 밀가루빵같은거 위에 소세지 양파 이런저런거 얹은건데 진짜 맛있어. 밀가루로 만든 빵이라 그러면 식빵, 케잌, 앙꼬빵, 곰보빵 다 푹신한 것들이라 파삭파삭한 밀가루빵이라는게 상상이 안갔다. 고등학교때 이야기다. 대부분의 한국사람들이 햄버거도 제대로 된 걸 먹어볼 길이 없던 시절에 피자라는 음식을 먹어보지않고 맛을 상상하는건 더욱 무리였다. 

나는 우연히 고등학교때 동두천 미2사단 캠프케이시에서 하는 카니발 행사에 들어가 볼 기회가 있었다. 아마도 일년에 한두번 대민접촉의 일환으로 일반인들에게 영내를 공개하는 행사가 아니었나 싶다. 사람들은 천막을 치고 여러곳에 장터처럼 펼쳐놓은 가게들에서 이런저런걸 사먹을 수가 있었는데 햄버거가 제일 인기가 있었다. 정말로 맛이 좋았다. 영내는 숯불에 연신 구워대는 고기로 연기와 냄새가 진동을 했는데 너무 이국적인 냄새여서 아직도 강렬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병이나 캔에 찐덕하게 말라붙은 콜라와 맥주의 달콤한 향기가 곳곳에서 풍겨 고기냄새와 잘 어울렸다. 

핫도그란게 어묵으로 만든 핑크빛소세지를 나무젓가락에 꼽아 밀가루반죽을 입혀 튀긴게 아니라 길다란 빵을 반으로 갈라 진짜 소세지를 구워넣은뒤 다진양파 오이절임을 넣고 케챱과 겨자를 뿌려 먹는거라는 걸 처음 경험하였다. 미국영화나 만화에서 그렇게 먹는걸 보기는 보았지만 먹어보긴 처음이었다. 놀랐던 건 양파, 오이절임, 케찹, 겨자를 옆에 잔뜩 놔두고 알아서 마음껏 먹도록 해놓은 것이었다. 부자나라는 다르구나 싶었다. 든든한 접시, 포크, 나이프를 한번 쓰고 버리는 것도 보기에 아까웠고, 종이 내프킨을 마구 쓰고 버리는 걸 보고도 기가 죽었다. 어찌하여 부자나라 미국사람들이 즐겨 먹는다는 정통 햄버거와 핫도그를 먹어보긴 했어도, 피자파이라는 이름으로 들어온 '미국식 피자'의 맛을 알게되기까지에는 한참 시간이 걸렸다. 

그 시절 영화가 젊은이에게 미치는 영향은 지금보다 크면 컸지 적지 않았던 것 같다. 한국영화는 '고무신 영화'라고 해서 수준이 턱없이 낮았고 진짜로 어쩌다 보게되면 두손두발이 다 오그라들곤 했다. 그럴때 헐리웃영화는 커다란 동경의 대상이었다. 영화속의 뉴욕의 다이너, 베벌리힐즈의 레스토랑, 학교 카페테리어에서 나오는 각종 메뉴와 음식은 참으로 대단하였다. 그럴때 '모처럼 칼질한다', '썬다' 등의 표현으로 지칭하던 '양식'은 어쩌다 먹어서 그런지 별로 맛이 없다고 느꼈다. 종이처럼 얇은 돈까츠도 그랬고, 멀건 수프도 그랬다. 지금 생각해보면 만드는 사람도 맛을 잘모르던 시절이어서 정말로 맛이 별로 였던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 때는 경제사정을 비롯한 모든면에서 미국하고 우리나라의 차이가 너무나 커서 미국, 그러면 그냥 기가 죽을 때였다. 미국으로 이민을 가는게 '출세'로 여겨지던 시절이기도 했다. 그래서 재미교포들은 한국에 나와서 참 결혼하기가 쉬웠다. 주유소 혹은 마켓을 경영하며 링컨컨티넨탈이나 캐딜락을 탄다고 하면 한국에선 대통령이나 타는 차를 타는 신분이니 참좋은 혼사자리가 아닌가. 교포들이 얼마나 힘들게 노동을 하여야하고, 풀장이 달린 집이나 커다란 자동차를 가능하게 해주는 모기지론이라는 제도가 뭔지 한국사람들에겐 이해가 될 리가 없었다. 거꾸로 이민간지 몇년안된 사람에게 은행이 돈을 꿔줘서 집사고 자가용사게 해주는 나라라는게, 서민은 연리 수십퍼센트에도 돈을 빌릴수 없었던 가난한 한국사람들에게는 그저 선망의 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 

지금은 미국에서 벤츠, BMW, 렉서스를 타는 사람이 있어보이지만 그 때는 미국산 자동차가 으뜸이고 일본차는 작고 연비가 좋은 맛에 타는 세컨브랜드였던 시절이었다. 오죽하면 '미국에 가면 꽁초를 주워피워도 양담배'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미국이라는 나라를 부러워 했을까. 반미정서는 광주이후에 생겨난 것이었고, 학생운동에서도 반미라는 말은 전혀 나오지 않던 시절이었다. 아득한 옛날이야기를 하다보니 '가난'과 '추억', '기억'이라는 단어가 너무나 자주 등장하는 것 같은데, 별도리가 없어 신경쓰지않고 입에서 나오는 대로 쓰기로 한다. 

사람살기는 다 마찬가지여서, 그 옛날에도 멋을 내는 사람은 멋을 내고 낭만을 찾는 사람은 낭만을 찾으며 청춘을 보냈던 것 같다. 장발, 청바지, 통기타는 당국으로부터는 반항의 이미지로, 또 가끔씩 다른 쪽으로 부터는 시대의식없는 퇴폐의 상징으로 탄압과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서울대가 이사를 가고나서도 동숭동에는 학림다방, 중국집 진아춘 등 옛날 가게들에 더해서 오감도, 난다랑 등의 새로운 가게들이 들어섰고, 혜화동 로터리에서 성균관대가 있는 명륜동까지에는 에이펙스, 동백, 카사노바등의 경양식집이 '돈이 있는 대학생'들의 주머니를 노렸다. 한번은 명륜동 카사노바에 갔을 때 저녁 이른 시간에 젊은 여성하나가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피아노는 잘치는데 노래를 부르는 창법이 유행하던 포크나 팝이 아니라 트로트에 가까워서 인상에 남았다. 나중에 TV를 보고 그때 들었던 노래가 '그때 그사람'이었고 노래를 부른 이가 심수봉이어서 놀랐다. 얼마안있어 그 이는 역사적인 현장에 있는 걸로 더욱 유명해 진다.  

그 시절 모든 경양식집에 공통된 새로운 메뉴가 있었으니 바로 그게 '멕시칸 사라다'였다. 가게마다 레시피도 다르고 맛도 썩 뛰어난 것도 아닌데 어느 집 메뉴에나 들어있어서 만만하게 시킬수 있었으니 아마도 주방에서 누구나 쉽게 만들어 낼 수 있어서 유행을 한게 아닌가 싶다. 레터스보다는 잘게 썬 양배추에 삶은 계란, 오이, 어쩌다 토마토 등이 들어있는 샐러드였는데 마요네즈와 케쳡을 섞은 핑크빛 드레싱은 어느집이나 한결같았다. 

위에 말한 '돈이 있는 대학생'이라는 표현은 풀어서 표현하면 '어쩌다 돈이 생긴 대학생'을 말한다. 그 때는 많은 대학생들이 아르바이트로 가정교사를 하거나 과외공부를 가르쳤고, 월급을 받는 날부터 며칠간은 주머니 사정이 넉넉해졌다. 그럴때 큰 맘먹고 경양식집에 가서 멕시칸사라다에 음료를 시킬 수 있었고, 더 큰 맘을 먹으면 함박스텍이나 비프스텍을 시키기도 했는데 내 기억으로 후자인 그 스텍이라는 고기메뉴를 경양식집에서 맛있게 먹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음료는 맥주를 시키거나 당시 유행하던 '애플와인 파라다이스'를 시켰다. 

고등학생들도 밤에 공부를 하며 모두가(내 주변의 모두가. 진짜 우등생들은 어쨌는지 모름) 라디오 음악프로그램을 들었는데 이장희가 진행하는 동아방송의 '영시의 다이얼'이 제일 인기가 있었다. '별이 빛나는 밤에', '밤을 잊은 그대에게' 등 방송국마다 인기 DJ들이 프로를 진행했는데 FM이 아니라 AM이 대세였다. 프로마다 '주고싶은 마음 먹고싶은 마음 빙그레 아이스크림', '하늘에서 별을 따다.. 오란씨', '아카시아 껌', '아름다운 여성...비너스' 등의 많은 광고 스폰서가 붙었는데 제일 인상에 남는 건 역시 '방울방울 떨어지는 액체의 보석, 애플와인 파~라다이스' 였다. 

명동 유네스코 회관 옆골목으로 올라가면 유명한 '오비스캐빈'이라는 젊은 고객을 겨냥한 커다란 생맥주 라이브 하우스가 있었고, 건너편에는 '관광열차'라는 장년층을 위한 가게가 있었다. 다들 유명한 가수들이 출연하는 곳으로, 그 때는 돈쓰기로 마음먹고 몇집을 다니기로만 작정한다면 하룻밤에 모든 히트가수들을 라이브로 들을 수 있던 시절이었다. 물론 그랬다는 사람을 본 적은 없다. 관광열차 옆에는 '알라스카'라는 술집이 있었고, 그 위에 '로즈가든'이라는 경양식집이 있었다. 그 로즈가든에서 '박원웅과 함께'라는 프로그램을 매주 한번씩 공개방송으로 녹음을 하여서 간단한 음료만 시키고도 유명가수들의 노래를 들을 수가 있었다. 그 때 반주를 담당하던 하우스밴드가 '딕 패밀리'였다. '빠빠빠 빠빠빠... 이제는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이라는 노래로 유명해진 그룹이다. 

인기 DJ 이종환씨가 운영하던 셸부르도 유명했고, 몽셸통통, 뢰벤브로이, 조선호텔의 투모로우와 예스터데이, 그 옆의 포시즌 등도 통기타 생음악을 들을 수 있는 가게들이었다. 명동에는 이것 말고도 필하모닉이라는 음악감상실이 유명했다. 광교에 있는 음악감상실 '아폴로'는 보다 진지한 클래식 팬들이 모였던 것 같다. '르시랑스'라고도 있었는데 이야기만 들었고 나는 한번도 들어가본적이 없다. 종로2가에 있던 '이브'라는 곳에서는 '신중현과 엽전들'의 라이브연주를 몇번 보았던 기억이 난다. 

그 시절 제일 '잘 논다'는 부류는 '고고장'이나 '나이트'라고 불리던 곳을 다니던 사람들이었다. 명동에도 여러곳이 있었고, 영업허가 때문이었는지 호텔 나이트가 유명했다. 통금이 있던 시절이라 12시가 넘으면 업소에서 4시까지 있어야 했다. 고고 두곡에 브루스 한곡이 번갈아 나왔는데, 그 때나 지금이나 춤을 잘 못추는 나로서는 밤을 새워 춤을 추는 이들의 열정과 힘이 부러울 따름이었다. 친구따라 강남간다고 끌려나가듯 몇번 가보았는데, 춤을 추는 사람들의 심리를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은 춤이 정말로 좋은 예술이란걸 알고 또 춤 잘추는 사람을 매우 부러워하게 되었지만. 새벽 4시가 넘으면 이들은 쏟아져 나와 해장국집이나 새벽다방에서 해장국이나 계란푼 커피로 쓰린 속을 달래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 때 제일 잘나가던 나이트는 남산에 있던 타워호텔 나이트였다. 내 주위에도 거길 자주 다니는 친구가 하나 있었는데, 그는 사회인이 되어서도 잘놀았다. 요즘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여전히 풍류를 즐긴다고 한다. 노는쪽 DNA가 발달하였고, 또 그걸 받쳐줄만한 건강과 여건이 되는 걸 보면 전생에 나라까지는 아니어도 뭘 구하긴 구한 모양이다.

내가 대학교 2학년때 였을 것이다. 아르바이트를 하고 월급을 받은 날, 용기를 내어 좋아하던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서 저녁을 먹자고 하였다. 이른바 데이트를 신청한 것이다. 로즈가든이었던가 아니면 명동의 다른 집이었던가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아무튼 멀리 무대에서는 그룹사운드가 음악을 연주하였고, 나는 파라다이스와 멕시칸사라다, 그리고 함박스텍을 시켜서 기분을 내었다. 그 때는 제대로 된 데이트는 그런데 가서 그래야 되는 줄 알았다. 홍능갈비에 가서 갈비를 먹던가, 맛있는 중국집에 가서 탕수육 양장피에 물만두를 시켜먹었으면 훨씬 좋았을 것을. 위의 그림은 그 날을 되짚어 보며 대충 그려본 것이다. 늘 느끼는 거지만 추억은 아름답다... 

평소엔 주머니사정도 넉넉치 않아서 라면이나 된장찌개를 먹고 술은 막걸리를 사마시는 걸로도 족했는데, 어느날 형준이가 새로운 복음을 전파하듯 아이들을 무교동으로 끌고나가기 시작했다. '삼겹살'이라는 메뉴가 등장한 것이다. 드럼통 테이블에 파무침과 신김치를 넉넉히 놓고 삼겹살을 구워서 먹는 집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특히 무교동 골목에 여러집이 생겼는데 우리 친구들은 주로 '개미집'을 애용하였다. 연신 배어나오는 기름을 식빵으로 닦아내는게 특징이었다. 삼겹살이 유행하면서 우리의 주종도 막걸리에서 소주로 어느샌가 옮겨가 있었다. 



나으 음식일기(18): 커피와 담배, 담배와 과자 그리고 라면 나의 반백년 음식일기


어제 간만에 집에 돌아왔다. 이번 출장에서는 대단한 애연가와 며칠간 행동을 같이 하였다. 그 분은 식사를 하다가도 잠깐 실례, 이러고는 도중에 나가서 담배를 한 대 피고 와야할 정도로 애연가이다. 같은 호텔에 묵으면서 약속장소로 가기위해 로비에서 만나기로 하면 의례 오분 십분 먼저내려와 바깥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문득 두가지 사실이 머리에 떠올랐다. 최근에 내 주위에도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이 많이 줄었다는 것, 그리고 또 하나 옛날에는 이런 광경이 없었던게 다들 실내에서 어디서든 담배를 피울 수가 있었기 때문이란 사실이 그것이다. 참 아득한 옛날이었던 것 같은데 식당안에서 담배를 피우는게 당연했던게 불과 얼마전의 일이로구나, 생각하니 빠르게 변해가는 세태에 적응해가는 사람들이 새삼 놀랍기도 하다.  

위의 사진은 내 스마트폰에서 최근 사진을 훑어서 잠깐 사이에 쉽게 찾은 커피 사진들이다. 여기에 담배가 없다니, 세상에... 아무 의식이 없이 지나갔는데 돌이켜보니 나 역시 한 때는 커피와 담배는 뗄래야 뗄 수가 없는 사이라고 믿었던 적이 있지 않았던가. 고등학교시절 경제를 가르치는 선생님도, 참고서에서도, 보완재를 설명할 때는 커피와 담배를 예로 들었지.  

주말동안 피곤한 여독을 푼다고 자리에 누워 딩굴딩굴하다가 일어나 밥챙겨먹고 다시 딩굴딩굴하며 내 생활에서 사라져 기억의 저편으로 들어가 숨은 담배와 얽힌 추억을 파내보았다. 무척이나 즐거웠던, 아련했던, 소중한 기억들이 풀린 실타래처럼 솔솔 끌려나와 기억에 묻어두기에는 억울할 정도였다. 한 때는 행복하게 지내다 어떤 이유로 무정하게 버려야했던 과거의 여인을 안쓰러워 하듯(경험이 아니라 수사학적인 표현), 담배에 대해 괜히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내가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던 건 2월달에 고등학교 졸업식을 마치고 3월 대학입학을 몇주 앞둔 시점이었다. 고3 말쯤이면 반 아이들의 삼분지일 정도가 담배를 피우기 시작하던 시절이었다. 나는 친한 친구와 을지로입구에서 명동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또또와'라는 경양식집에 들어갔다. 생애 첫담배를 피우기 위해서였다. 당시 '주다야싸'라고 낮에는 다방이고 밤이면 주류를 파는 업태의 가게가 유행했는데 그런 집이었다. 아마 처음으로 떳떳하게 담배를 피우는 의식을 치르기에 그냥 동네 다방은 너무 평범하다고 여겼던 모양이다. 우리가 들어가 앉자 아주 짧은 미니스커트를 입은 아가씨(그 때 나이로 봐선 누나뻘이었겠지)가 와서 주문을 받았다. 여기 커피 두잔하고 한산도 한갑 주세요. 그녀가 네, 하고 대답한 뒤 카운터를 향해 돌아간 뒤 나도 이제 어른이 되었구나 하는 생각에 약간 가슴이 뻐근해 왔다. 어른과 미성년의 차이는 당당하게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울 수 있냐의 여부라고 단순히 생각하며 살던 때였다. 

그리고 나는 다른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대학시절동안 담배를 피웠다. 술집에서 술을 마실 때면 다들 줄담배가 되어서 술집은 학교앞 선술집, 그많던 무교동 광화문 막걸리집, 어디나 들어가면 담배연기가 자욱했다. 지금와 생각해보면 어쩌다 담배를 안피우는 사람들, 여학생들은 어떻게 그런데서 같이 자리를 하며 견뎠지 신기하다. 당시에 모든 남자들이 담배를 피웠던 만큼 그와 반대로 여성들의 흡연율은 매우 낮았고 공공연히 담배를 피울 수 있는 분위기도 아니어서 여학생들이 담배를 편하게 피울 수 있는 카페 경양식집이 따로 있었다. 이것도 편견이었겠지만 담배를 피우는 여성은 더 개방적이고 진취적이라는 이미지도 있어서 뭔가 멋있어 보이기도 하였다. 여대생 가운데에는 문학, 연극, 미술, 무용 이쪽 전공하는 이들이 담배를 더 많이 피웠다는 인상이 남아있다.  

술을 먹을 때는 맛도 모르고 습관상 담배를 연신 입에 물었지만, 진짜로 담배가 좋고 잘 어울린다고 느낄 때는 아까 잠깐 언급했듯이 커피를 마실 때 였다. 그래서 다방도 어딜가든 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연기가 자욱했다. 당시는 젊은이들이 연인끼리건 친구끼리건 다방말고는 변변하게 시간을 보낼 곳이 없어서, 음악이 있고 커피가 있던 다방에 밴 담배냄새는 젊은이들의 냄새쯤으로 여겼는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그때는 역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위는 '담배와 커피'를 영어로 구글 이미지 검색을 해본 첫번째 페이지이다. 역시 동서양을 막론하고 커피와 담배의 궁합은 찰떡이다. 그러고보니 잊고 있었는데, 짐자무쉬의 Coffee and Cigarettes 라는 영화가 있었지. 아직도 담배를 피우는지 모르겠는데 그는 정말로 애연가였다. 남의 건강에 무책임한 말이지만, 그가 금연을 했다면 좀 실망스러울 것도 같다. 폴오스터의 단편을 바탕으로 제작된 웨인왕의 명작 '스모크'는 무대가 브루클린에 실재했던 담배가게이기도 한데 영화안에 등장하는 인물 모두가 정말 맛있게 담배를 피운다. 

'스모크'를 찍을 때 사용하지 않고 남은 장면들에 더 보태어 새로운 장면을 찍어 넣어 완성한 것이 '블루 인 더 페이스'인데 짐자무쉬가 여기에서 정말로 담배를 맛있게 피웠던게 기억난다. 그는 커피와 담배에 얽힌 단편 11편을 모아놓은 '커피와 담배'라는 영화를 쓰고 감독했는데, 일일이 열거하기가 힘들 정도로 쟁쟁한 배우들이 나온다. 빌머레이도 나오고 로베르토 베니니도 나오는데 케이트 블란쳇의 일인이역이 뛰어난 '사촌'이라는 단편도 강추다. 아래는 탐웨이츠와 이기팝이 나오는 단편이다. 스포일러 방지를 위해 이야기는 생략하는데, 11편 모두 실내(가정집이 아니라 식당이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담배를 피우는 내용이니 요즘같으면 어림도 없는 이야기라 하겠다. 


하긴 불과 얼마전(나한테는 그렇게 느껴진다)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비행기안에서도 담배를 피울수가 있었다. 비행기 좌석이 금연섹션과 흡연섹션으로 나뉘어졌는데 흡연자들 가운데 상당수가 금연석에 앉아 담배를 피울 때만 뒤쪽 흡연구역으로 가곤 해서, 흡연석에 충성을 다한 애연가들로부터 기회주의자라고 비난을 사던 기억이 있다. 

요즈음은 미성년자는 제도적으로 아예 담배를 살 수가 없게 된 모양인데 우리가 어렸을 땐 담배는 어느집이고 아이들이 심부름을 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리고 아이들도 잔돈을 챙긴다던가 얼마 더 얹어서 용돈을 받는다던가 해서 싫어하지 않았던 것 같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냥 아이들에게 용돈을 주려고 담배심부름을 시키는 경우도 있었다.  

내기억속에 가장 오래된 담배는 아리랑이다. 25원때 심부름하던 기억이 있고 35원까지 올랐던가 했을 때에 파고다가 나왔다. 그 때 담배가게겸 구멍가게를 겸했던 상점에서 팔던 과자로는 해태 '시가검'이라는 껌이 있어서 필터까지 달린 담배모양을 하고 있어서 아이들은 포장지를 까고 입에 넣기전에 푸우하고 한두모금 담배피우는 시늉을 하곤 했었다. 요즘같으면 어린이 흡연조장이니 해서 허가도 안나왔을 제품이다.

그 다음에 파고다가 나왔다. 옛날에는 담배값을 올리지않고 새상품을 내어서 값을 인상하는 효과를 냈던 것 같다. 파고다는 40원인가 50원이었던 것 같다. 이 담배가 나왔을 때에는 '드롭뿌스'라고 하는 알록달록한 사탕이 인기가 있었고 '커피캰디'라는 커피맛 사탕이 있었다. 커피대신 한 알, 이런 카피가 있었으니 카페인이 들어있었을 터인데 아이들은 먹지말 것, 이런 문구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리고 뒤이어 신탄진이 나왔는데 처음부터 60원이었는지 50원에서 올라서 60원이었는지 기억에 가물가물한데 이걸 심부름 할 때에 처음으로 한국산 진짜 쵸콜렛이 나왔다. 해태에서 나왔고 광고모델로 신동우 화백의 홍길동, 곱단이, 차돌바위가 등장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아래 담배사진은 이미지를 검색하다보니 거의 모두 한군데가 출전이었다. 
http://m.hbs1000.cafe24.com/ 6080추억상회 라는 곳인데 담배말고도 좋은 추억거리가 많아서 한참 생각에 잠길 수가 있어서 좋았다. 이런 분들이 계셔서 생활이 조금이라도 풍요로와 지는 것 같다. 

나라 전체가 가난하고 낙후해서 인쇄도 조잡하고 그러던 시절에 화려한 금박이 유난히 눈부시던 청자가 나왔다. 가격도 백원이었다. 어린 나의 눈에도 청자는 대단히 고급스러워 보였다. '담배 한갑에 백원이라니'하는 물가앙등에 대한 서민의 불만이 터져나오기도 해서 내 귀에도 들렸다. 그리고 청자를 넘어서 은하수가 나왔고 또 한산도가 나왔다. 이 때부터 고급 담배는 맛에 따른 차이인지 브랜드가 두개로 나뉘어졌는데 처음엔 140원이었는데 이 가격을 기억하는건 선생님들 심부름을 몇번 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올라서 220원이 되었을 때는 내가 대학생이 되어 담배를 피울 때였다. 그러니까 내가 흡연을 시작할 때 입에 물기 시작한게 은하수와 한산도인 것이다. 

새마을이라는 담배가 있어서 아주 쌌는데 고집스럽게 이걸 피우는 친구들이 주위에 몇명 있었다. 프랑스 유학에서 돌아온 교수님도 한분 이걸 애용하셨다. 풍년초는 말아피우는 담배였는데 시골에 내려가면 노인네들도 곰방대에 넣어 피우고 젊은이들도 종이에 말아서 피우고 그랬다. 당시 캘린더는 달력뿐 아니라 매일 매일 떼어내는 일력이 있었는데 이게 아주 얇은 습자지 같아서 뒷간 화장지로도 쓰고 담배마는 종이로도 쓰고 그랬다. 그리고 누군가는 담배말아피우려고 교회에 나가서 성경책을 받아오고는 다시 안나갔다는 이야기도 건너건너 들었던 기억이 있다. 

스포츠라는 담배가 있었는데 이게 청소년들과 아주 인연이 깊은 담배였다. 한갑에 여섯가치밖에 안들어 있어서 부피도 작고, 딱성냥이 붙어 있어서 청소년들에게 안성마춤인 제품이었다. 나도 동네 형아들한테서 부탁을 받아 몇번 사다준 경험이 있다. 그들이 못사서가 아니라 바빠서(홀짝, 으찌니쌈 같은 짤짤이라 불리던 도박) 그랬던 것이었다. 결국 이 제품은 내가 기억하기에 청소년 흡연문제도 있고 해서 단종된 것으로 안다. 

그러고 보니 당시에는 까치담배라고 해서 동네 버스정류장마다 사과궤짝하나를 놓고 신문도 팔고 하는 조그만 행상이 여럿있어서, 여기서 담배를 까치로 팔았다. 한갑에 140원할때 한가치에 10원, 300원할때 한가치에 20원 했던 기억이 있는데 220원 할 때에는 어떻게 팔았는지 기억에 없다. 나도 친구들이랑 술을 먹고 헤어질 때 담배가 서로의 주머니에 없으면 까치담배를 사서 한 대씩 나눠 피우고 버스에 올랐던 기억이 난다. 


썬하고 거북선은 내게 참으로 많은 추억이 담겨있는 담배이다. 명동 유네스코회관 길을 올라가면 왼쪽에 까뮈라는 커피숍이 있었는데, 인테리어도 고급스럽고 여러 브랜드의 본차이나를 사용하여 손님마다 내어주는 커피잔도 모양이 달랐다. 그리고 그집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포엠이라는 커피숍이 있었다. 당시로는 보기힘들던 싸이폰을 이용하여 커피를 내려주던 곳이었는데 아침 일찍 그곳에 가면(아침부터 왜 갔는지는 모르겠다) 가게 전체에 퍼진 커피향이 너무도 좋았다. 나중에 두 집은 한글전용 정책에 따라 각각 '가무'와 '시'로 상호를 바꾸었다. 

담배가 커피와 어울리는 것은 분위기 탓도 있었을 것이다. 다방에 죽치고 앉아 커피를 마셔봐야 미국처럼 계속 리필을 해주는게 아니라 한잔 홀짝 마시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계속 미지근한 보리차만 마셔야 했는데 그래도 담배는 줄창 피웠으니까. 그 때 얘기를 하면 친구들이 다 동의하는게 있으니 라면을 먹고나면 담배가 정말 맛이 좋았다. 아마도 입안이 뜨거운 국물에 마비가 되어 담배가 순하게 느껴져서 그런건지도 모르겠다. 분식집에서 라면말고 매운 쫄면을 먹고나도 담배가 맛있기는 마찬가지이니 아마 일리가 있지 싶기도 하다. 

분명 '썬'이라고 기억을 했는데 위의 사진을 보니 '태양'으로 디자인이 바뀌어 있다. 썬하고 거북선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내기도 전에 벌써 이렇게 길어져 버렸다. 다음번에 담배와 얽힌 멕시칸 사라다와 함박스텍, 애플와인 파라다이스, 그리고 당시 연인들의 데이트 이야기를 해야겠다. 머리속은 벌써 셸부르, 세시봉, 신중현 그리고 시카고 코모도스 퀸의 멜로디로 가득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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