匠, 끈기와 우직함의 미학: 요시노야(吉野家)이야기(3) 일본이야기


"거장의 귀후비개. 최고의 힐링은 이것 하나로 부터..." 딱 들어맞는 번역이 없는 것 같군요. 우리말에서 딱 들어맞는 표현을 찾기 힘든 일본말 가운데 匠라는 글자가 있습니다. 읽기는 '다쿠미'라고 합니다. 이 글자는 우리말로 장인할 때 '장'자 입니다. 그러면 위의 사진에 나온 '匠の耳かき'라는 카피는 '장인의 귀후비개'라고 해도 되겠지만 저는 일부러 '거장'이라고 하였습니다. 거장도 사실 딱 맞는 표현은 아닙니다. 거장하면 뭔가 거창하게 뽐내는 듯한 위엄이 들어있는 듯 합니다. 다쿠미는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우리말로 장인, 그러면 전문 기능인이라는 뜻 말고 별달리 다른 뜻이 더 들어있는 것 같지가 않습니다. 일본어로 '다쿠미(匠)’라고 하면 일정한 경지에 오른 이에 대한 존경과 찬사의 뜻이 들어있습니다. 아래는 다쿠미라는 검색어로 찾아서 나온 이미지 캡쳐입니다. 

술에도, 그릇에도, 옷에도, 심지어 라면에도 자랑스럽게 이 글자를 브랜드로 붙입니다. 몇 대씩 내려가며 가업을 이어온 다쿠미들이 일본에는 각분야에 걸쳐 수두룩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렇게 반열에 오른 대가를 칭하는 새로운 단어가 생겨날 만큼 많은 장인이 여러분야에서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더 바람직한 건 '장인'이라고 기왕에 있는 말에 이러한 존경심과 칭송이 실리도록 사회적 분위기가 변하는 것이겠지만 쉽지는 않을 것 같네요.  

위의 사진에 있는 '究極の癒しはこの一品から'라는 카피를 '최고의...'라고 번역한 것도 사실 좀 맘에 들지가 않습니다. 究極(큐우쿄쿠)라는 말은 우리말 한자어로 '궁극'에 해당하는데 영어로 하자면 ultimate에 해당합니다. supreme도 때로는 그럴듯 합니다. 이 말이 일본어에서는 일상적으로 자주 쓰이는 표현인데 거기에는 '끝까지 추구하여 정점에 도달'했다는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우리말 정서에서는 딱맞는 표현을 찾기가 쉽지 않네요. 오늘 요시노야 규동 이야기 그 세번째인데 다쿠미를 간단히 설명하고 들어가려고 하다보니 얘기가 잠시 밖으로 돕니다. 

귀후비개 사진은 '다쿠미'로 이미지 검색하다가 나온 건데, 일본의 장인문화를 예로 들기에 딱맞아서 조금 더 들어가봅니다. 홈피를 들어가보니 공무원을 하던 이가 취미삼아 귀후비개를 깎다가 그걸 업으로 삼아 만들기 시작한지 30년이 되었다고 하네요. "귀 깊숙히 숨겨진 안락함... 귀후비개는 사람에 따라 취향이 천차만별입니다. 귓구멍의 크기, 귀지의 성질, 손의 크기, 잡는 감각, 후빌 때의 강도, 자신을 후비는 용도인가, 무릎을 베고 남이 후벼줄 때인가 등 모두가 다릅니다. 다쿠미의 귀후비개는 한사람 한사람의 취향에 맞는 귀후비개를 하나하나 정성을 들여 만듭니다. 우선은  '자신의 취향'을 알고서 찾아보면 어떨까요..."  홈피에 쓰여진 설명을 간단히 옮겨본 겁니다. 이에 대한 설명은 생략합니다. 

아래를 보세요. 보통형은 3,000엔 입니다. 다른 모델은 15,000엔에서 18,000엔 입니다. 우리 돈으로 귀후비개 하나에 십오만원에서 십팔만원입니다. 명품은 비싸도 알아주는 이가 있어 나름 팔린다는 문화가 일본의 '다쿠미'문화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딴 이야기입니다만, 이비인후과 선생님들은 귀후비는 거 위험하다고 말리십니다만, 저는 참 좋아합니다. 돈 있으면 좋은 거로 하나 사고 싶네요...


요시노야 이야기로 들어갑니다. 요시노야가 '규동 100년' 씨리즈로 TV CF를 제작한 동영상이 있습니다. 쯔키지 1호점의 1959년 모습을 재현한 광고인데 꽤 재미가 있습니다. 첫장면은 고층건물이 없던 당시 막 준공한(일년전인 1958년) 도쿄타워만 불쑥 솟은 도쿄의 모습에서 나레이션이 시작됩니다. "때는 1958년 도쿄 쯔키지 한 코너에 요시노야 1호점이 있었다..." 그리고 당시의 점포 밖 풍경과 가게 안 모습이 나옵니다. 어시장 도매에 관련한 사람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리고 능숙하게 고기와 양파, 쯔유를 한번에 떠서 밥 위에 얹는 아버지와 손님들과 농을 주고 받는 아들의 모습이 비춰집니다. 


그 다음 나레이션은 자막으로도 나옵니다. " 100년동안 이어지는 일본의 맛", " 규동은 요시노야". 

요시노야의 슬로건은 '맛있고, 빠르고, 싸게' 입니다. 빠르게 내겠다고 두부, 곤약국수, 파 등을 과감하게 생략하고 소고기와 양파 그리고 쯔유만 가지고 만든 3천원짜리 소고기 덮밥 하나로 연 매출 1 조원을 달성한 브랜드인데 이걸 100년간 지켜가겠다는 선언에서 대단한 자부심과 자신감이 엿보입니다.



규동에 밥을 담고 위에 소고기와 양파를 국물과 함께 얹는 데에도 노하우가 필요합니다. 지난 번에 소개한 아베 슈지 회장의 저서에서 인용을 합니다. 

"...처음에 맡은 일은 주방에서의 잡무입니다. 냄비를 씻고, 청소를 하고, 물론 돈부리(그릇)도 씻고. 바쁠 때에는 한시간에 돈부리 200그릇이 나갑니다. 머뭇머뭇 하고 있으면 그릇이 모자라게 되니까, 어쨌거나 바삐 움직입니다... (중략)...반 년쯤 지나자 밥도 담고 고기도 담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밥을 담고 고기를 담는 것은 특수기능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금방 익힐 수는 없습니다. 

밥은 돈부리에 두번에 나눠 담습니다. 첫 번째에 6,7할 정도 담고 두 번째에 나머지 3,4할을 마저 담는데, 압력을 가해서는 안되고 부드럽게 가운데가 약간 봉긋하게 담습니다. 가운데가 꺼져 있으면 고기와 다레(국물)가 가운데로 쏠려서 가장자리에 밥이 드러납니다. 그러면 고기가 적어보입니다. 10초에서 15초 사이에 10그릇 정도를 담는데, 고기를 담을 때는 냄비의 흘수선(수면을 표시하는 경계선)에 떠있는 고기를 오타마(국자)로 퍼서 밥위에 단숨에 담아냅니다. 동작이 느리면 국자의 구멍으로 국물이 너무 빠져나가고 맙니다. 

요시노야의 국자는 구멍의 크기와 47개라는 구멍의 숫자가 정해져 있어서, 그것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규동을 단숨에 담았을 때 밥에 대비한 국물의 양이 최적의 균형을 이루도록 만들어진 국자입니다. 이 국자를 가지고 일정한 리듬으로 담으면 국물의 양이 일정해 지도록 만들어 진 것입니다...(후략)"

전국 1천개 점포에서 동일한 맛을 재현하는게 가능한 데에는 그 이면에 국자에 뚫린 구멍까지도 경험과 연구의 결과로 최적화된 걸 만들고 또 고기를 뜰 때 작업자가 서야 할 위치까지도 지정한 매뉴얼이 있더군요. 

요시노야는 확대노선을 걷다가 도산의 위기에 빠집니다만, 이는 경영상의 문제이므로 생략하고, 광우병 파동이야기를 간단히 소개합니다. 2003년 말, 미국산 소고기의 광우병 파동으로 일본에는 미국산 소고기의 수입금지령이 내려집니다. 요시노야는 미국에서 소고기의 쇼트플레이트 부분을 수입하는데 '요시노야 스펙'이라고 불리는 커트를 만들어 낼 정도로 큰 손입니다. 요시노야 뿐이 아니라 일본의 규동업계는 패닉에 빠집니다. 그런데 이 회사는 곡물로 사육한 미국산 소고기와 거기에 최적화 된 다레를 만들어 낸 레시피를 다른 나라 소고기로 대체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됩니다. 호주, 뉴질랜드,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을 돌아다니며 수입해 봤자 전체 점포에 공급할 양도 확보가 안되고, 균일한 맛도 보장이 안된다는 결론에 다다릅니다. 

고객들이 기대하는 익숙한 맛을 서빙할 수 없을 바에야 만들지 않겠다는 극약처방을 내리고, 남은 고기 2개월분이 소진되자 일본 전국의 요시노야 체인에서는 규동이 사라집니다. 최대의 적은 '어떻든 규동만 내면 된다'라는 잘못된 마음가짐이며, 우리는 그저 규동을 파는게 아니라 '요시노야의 규동'을 파는 것이라는 사실을 서로에게 주지시키며 카레동, 돼지김치동, 야키도리동, 마파두부동, 연어이쿠라동 등의 메뉴를 개발하며 2년 이상을 버팁니다.

거의 3년이 가까운 세월이 흐른 뒤 미국산 소고기가 수입이 재개되어, 정확하게는 950일만에 요시노야의 규동판매가 재개됩니다. 재개(일본에서는 '부활'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발표가 나자, 충성스런 고객들의 기대와 환영 무드속에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었다고 합니다. 요시노야 본사로 익명의 편지 한통이 배달되었는데 200만엔의 현금과 예쁜 글씨로 쓴 다음과 같은 편지가 들어있었다고 합니다. 

"전략. 실례합니다. 얼마전 갑자기 세상을 뜬 저희 아들은 귀사의 규동을 대단히 좋아하였습니다. 옛날의 규동이 재개된다니, 아들도 기뻐할 거라고 생각하여 약소하지만 기부합니다. 힘든 상황이지만 규동팬을 위하여 노력해 주십시오.  이만 줄입니다. "

우리돈 2천만원이라는 큰 돈을 받은 본사는 되돌려주려고 했으나 발신인도 몰라 그러지도 못하기에, 2천엔 짜리로 바꾸어서 전국의 1천 점포에 편지의 복사본과 함께 나누어 주었다고 합니다. '이렇게도 요시노야를 사랑해주시는 고객들을 위하여, 모든 그릇에 정성을 담아 요시노야의 규동을 제공하자!'라는 슬로건도 함께요. 판매 재개의 날에는 전국에서 점포마다 장사진을 이루었는데 본사의 임원들도 모두 지원태세를 갖추어 현장에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이 회사의 모든 임원은 현장 점포에서 경험을 쌓은 사람들이라 언제든 옛실력을 발휘하는게 어렵지가 않다고 합니다. 판매 재개의 날은 마침 저도 일본에 있어서 저녁에 뉴스로 본 기억이 납니다. 

요시노야의 이야기는 이정도로 맺습니다. 특정회사를 칭찬하려는게 아니라 일본의 외식산업 문화의 단편을 소개하려고 모델로 찾은게 이 소고기 덮밥집이었을 뿐 입니다.  이 포스팅의 제목을 '다쿠미, 끈기와 우직함의 미학'로 붙였습니다. 처음엔 '성실'이라는 단어를 썼다가 지웠습니다. 그럼 우리나라는 성실하지 않냐는 반문이 들어서 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성실하지요. 그리고 부지런합니다. 게다가 일본사람들보다 똑똑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일본사람보다 부족한게 한번 정하면 싫증내지 않고 묵묵하게 반복하는 끈기가 아닌가 생각이 들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그네들의 미련할 정도로 우직한 태도가 부러울 때도 있고요.  

우리나라에 들어온 중국음식 유명 브랜드 점포에 몇 번 가본 경험이 있습니다. 처음엔 본바닥 점포와 맛이 비슷하더니 점점 달라져서 발길을 거둔 경우가 여러번 있습니다. 같은 가격에 같은 맛을 유지할 자신이 없다고 소고기 덮밥집에서 소고기 덮밥을 포기하고 몇년을 버틴 건 특이한 예라고 하겠습니다만, 우리도 이런 브랜드, 이런 메뉴가 몇 개 쯤 나왔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백년이 가도 변하지 않을 거라고 자랑할 만한 막국수, 냉면, 순두부찌개, 짜장면, 육개장 같은 걸 기대하여 봅니다. 무엇보다 김치찌개가 그랬으면 좋겠는데 김치찌개의 원료인 김치를 균일한 맛과 산도, 염도, 숙성도를 지키며 공급하는게 어려울 것 같아 포기하는게 낫지 싶어서 넣지 않았습니다.

다쿠미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이쯤에서 접습니다. 다음번에는 커피이야기를 계속해서 몇 번 쓰려고 합니다.   



한그릇 3천원으로 1조원 매출: 요시노야(吉野家)이야기(2) 일본이야기


얼마전 찍은 사진입니다. 소고기 덮밥위에 김치가 얹혔습니다. '파김치규동'이라는 메뉴입니다. 김치 원조국 한국인의 자존심을 세워 엄밀하게 이야기하자면 '파 기무치 규동'입니다. 우리나라 파김치가 아니라 삼겹살집에서 나오는 파무침과 김치를 섞어놓은 것 비슷합니다. '기무치'라고 생각하고 먹으면 먹을만합니다. 솔직히 기대보다 입에 잘맞아서 조금 놀랐습니다. 이 집은 요시노야(吉野家)가 아닙니다. 아래 사진에서 보이듯 스키야(すき家)입니다. 


저녁 8시 넘어 인천에서 출발하여 하네다로 가는 편이 대한항공 아시아나 모두 있습니다. 하루업무를 거의 마치고 떠날 수 있어 일본갈 때 자주 이용하는데 이게 한가지 안좋은 점이 있습니다. 입국사열 지나 짐찾고 뭐하고 나서 시내 들어가면 거의 12시가 넘는데 꼭 그냥 못자고 뭔가 먹어야 잠이 잘 올 것 같습니다. 삼단일망, 오조일망이란 말이 있습니다. 아니, 없습니다... 제가 그냥 혼자 만든 말입니다. 사흘 단식하듯 다엿을 해도 하루 잘먹으면 폭망하여 원상복구요, 닷새를 조신하게 먹어 체중을 조금 줄여도 한끼 폭식하면 도로아미타불 폭망이란 뜻입니다. 알면서도 어딜 가면 그냥 못자는 나쁜 버릇입니다. 옛날에 학교다닐때, 무슨 잘못을 했는지는 생각이 안나지만 '알고 그러는 녀석이 더 나뻐' 이런 말 들으면서 가중처벌을 받았던 기억은 납니다. 규동이야기로 돌아갑니다.



오밤중에 '가볍게' 소고기 덮밥 한그릇에 맥주 한 잔 하려고 길을 걷는데 스키야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커다란 '파 김치 규동(ねぎキムチ牛丼)' 입간판이 보입니다. 그 옆에 '저탄수화물 소고기 국수' 간판도 보입니다. 호기심 삼아 들어가 보았습니다. 요새 일본에서는 저탄수화물 제품이 유행이라 편의점 과자도 그런게 많습니다. 일본말로는 저당질(低糖質) 또는 로카보(ロカボ)라고 부르는데 로카보는 low carbohydrate를 일본식으로 줄인 겁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나중에 따로 다뤄볼까 합니다. 아무튼 이러저러한 연유로 밤한시경에 스키야에 들어가 파김치 소고기 덮밥에 미소시루, 날계란을 시켜 맥주 한병을 반주삼아 맛있게 먹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현재 일본에 규동체인은 여러개가 있는데 '삼대규동(牛丼御三家)'으로는 요시노야, 스키야, 마츠야(松屋)를 칩니다. 이제부터 나오는 사진은 전부 구글이나 해당 체인의 홈피를 캡쳐한 것입니다. 바로 아래가 요시노야.

아래는 스키야.

아래는 마츠야.

원래 요시노야가 선두를 달리고 있었는데 후발주자인 스키야가 맹렬하게 가맹점수를 늘려서 역전을 한게 2008년 입니다. 현재는 스키야가 점포수에서 2000점으로 1200점포를 가지고 있는 요시노야를 거의 더블스코어로 누르고 있습니다. 매출도 요시노야가 9천5백억, 약 1조원인데 비해 스카야는 1조9천억으로 더블입니다. 마츠야는 점포수 1100개, 매출 8천5백억으로 요시노야에 조금씩 뒤쳐지며 바짝 달라붙은 형국입니다. 

규동 한품목으로 사세를 확장한 요시노야와 차별화를 두기위해 스키야는 아래 사진에서 보듯이 파김치규동, 파계란규동, 세가지치즈규동, 오로시폰즈규동, 다카나명란마요네즈규동 등 종류를 다양하게 늘렸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다른게 카레를 함께 한다는 겁니다. 늘 먹는 일본의 국민음식인 카레를 간단하게 먹는 규동과 함께 메뉴에 넣은 것은 성공하였습니다. 두가지를 한꺼번에 맛볼수 있는 세트메뉴도 당연히 있구요.  

그러나 스키야는 과격한 성장전략의 부작용으로 종업원의 열악한 근무환경, 과로로 인한 발병 등 여러가지 문제가 노출됩니다. '완오페(ワンオペ)'라고 해서 심야 종업원 한사람이 가게를 맡는 경우를 이르는데, 이런 점포에 강도도 많이 들고, 쓰러지는 사람도 나오고, 바빠서 화장실도 못가는 상황등이 언론을 탑니다. 그 뒤 개선은 하였다고 하지만 아직 이런 부정적인 이미지는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마츠야는 메뉴의 다양화로 차별화를 합니다. 마츠야는 규동을 '규메시(牛めし)'라고 부릅니다. 홈피를 가보면 규동, 카레, 돈부리, 정식, 아침정식, 우동 등 다양합니다. 그리고 그 아래 사진에서 보이듯이 '정식'메뉴도 여러종류 있습니다. 우리나라 불고기에 해당하는 야키니쿠 정식, 갈비구이 정식 등이 눈에 띕니다. 햄버거 정식도 여러가지가 있네요. 저도 규메시말고는 먹어본게 없어서 맛이 어떤지는 잘 모릅니다. 드셔보신 분 덧글 달아주세요~ 



이렇게 다른 브랜드를 소개하는 것은 요시노야가 처음에 이분야에 있어서 얼마나 독창적이었나를 이야기하고 싶어서입니다. 규동의 유래를 이야기하자면 이렇습니다. 이 요시노야의 창업주가 쯔키지(築地) 수산시장에서 경매를 하거나 싱싱한 해산물을 대량으로 사러오는 사람들에게 팔기 시작한게 그 출발이라고 합니다. 아직도 일호점은 쯔키지에 있습니다(규동 좋아하는 매니어 가운데 성지순례하듯 이곳을 들리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네요). 경매를 하는 사람들은 일분 일초가 바쁜 사람들입니다. 주문하면 잠시도 기다리지 못하고 음식이 얼른 나와야 합니다. 그리고 후다닥 먹고 자리에서 일어섭니다. 바쁠때는 서서 먹는 사람도 있었다고 합니다. 다만 생선을 사는 사람들은 요식업 관계자도 많아서 입맛이 까다로와 맛이 좋은 집은 흥하고 그렇지 않은 집은 버티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런 환경에서 처음에 내던 규동은 밥위에 스키야키를 얹어주는 것과 비슷했다고 합니다. 간이 밴 소고기, 파, 두부, 곤약국수 등이 그 내용물이었으니 스키야키와 별로 다를 바가 없었겠지요. 그런데 효율을 생각하여 두부와 곤약국수, 파를 과감하게 생략하고 양파의 단 맛과 소고기의 감칠맛만 가지고 새로운 레시피를 만들어 냈다고 합니다. 물론 둘이 조화롭게 어울리고 흰 쌀밥과 잘 맞으려면 거기에 맞는 다레(소스)를 개발하는 과정도 필요했겠지요. 이런 이야기는 이곳 저곳 기사에 나와있는데 얼마전 가장 잘 정리한 책이 나와서 소개합니다. 아주 재미있습니다. 요시노야 홀딩즈 회장 아베 슈지의 저서 '요시노야: 더 도전하라! 더 실수하라!'라는 제목의 저서입니다.  



아베슈지(安倍修二)는 별명 미스터 규동으로 불리는 사람입니다. 1949년생으로 후쿠오카에서 태어났습니다. 학창시절 축구와 밴드에 열중했던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진학 같은건 안중에 없이 프로뮤지션이 되고자 상경을 합니다. 실제로 밴드를 결성해서 카페, 캬바레 등에서 연주활동을 합니다. 그는 블루스같은 본격적인 음악을 연주하는 밴드생활을 하고 싶었지만 가요반주를 해야하는 현실이 마음에 들지않아 소속에이전시에서 나와 독립을 합니다. 그리고 리더로서 동료들의 급료를 책임지지 못하게 되자 잠시 밴드를 접고 돈을 모으기 위해 요시노야라는 규동집에서 알바를 합니다. 일은 빡세지만 다른데보다 두 배 가까이 시급을 주었기에 한 일이년 일하면 다시 음악을 할 수 있겠다는 희망에 열심히 일합니다.

그게 마음에 들었던 점장의 추천으로 본사 면접을 보게 되었고 정사원이 됩니다. 그 때도 돈을 모아 음악으로 돌아가야지 하는 마음은 변하지 않았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야릇한 운명으로 그는 일이 너무나 재밌어서 힘든 줄 모르고 열심히 합니다. 그의 나이 22세 때 점장이 되었고, 27세에 규슈지구 본부장이 됩니다.  92년 42세의 나이에 사장이 되었고 22년간 사장으로 일하다가 2014년 회장직으로 물러나 앉으면서 경영의 일선에서 물러납니다. 

쓰다보니 또 이동을 해야할  시간입니다. 다음번에 이책에 담겨있는 그의 목소리를 빌려 요시노야의 성공과 좌절을 소개할까 합니다. 요시노야는 무리한 확장으로 도산을 하여 법정관리에 들어간 적이 있었는데, 그 위기를 넘기며 더 건강한 기업으로 거듭납니다. 그리고 광우병 파동으로 미국산 소고기가 수입금지가 되었을 때 메뉴에 규동이 없이 몇년을 버틴 기록이 있습니다. 성공한 모든 기업이 그렇듯이 들여다 보면 여기에도 감동의 스토리가 있습니다. 한국도 철학이 있고 고집이 있는 개인과 기업이 외식산업에서 많이 성장하는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쓰다말고 접자니 섭섭하여 트리비아 하나 소개합니다. 요시노야의 주황색은 사장이 초창기에 미국에 시찰을 갔을 때 체인점 하워드존슨 레스토랑의 색깔이 인상깊어 그대로 따라했다고 합니다. 

그 때 시찰단에 함께 참가한 멤버중에 '로얄 호스트' 사장도 있었는데, 거기도 하워드 존슨에서 색깔을 따왔다고 나중에 이야기를 듣고 서로 웃었다고 합니다. 기업이 잘되면 이런게 다 즐거운 추억거리가 되는 것 같습니다. 



오늘은 여기에서 접습니다. 내일 류현진 잘 던지면 좋겠는데... 주말 잘 마무리하시고 즐거운 한 주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덮밥 한그릇 사업, 성공 좌절 노력: 요시노야(吉野家)이야기(1) 일본이야기


지금은 많이 변해서 사정이 나아졌습니다만, 옛날엔 해외여행을 하면서 음식이 입맛에  안맞아 고생을 하는 분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제가 일본에 간지 얼마 되지않았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그나마 여러가지로 우리나라와 비슷하다는 일본에 와서도 맛있다는 스시도 한두 번, 우동 덴뿌라도 한두 끼니지, 고추장 김치 없이 달고 짠 음식만 먹자니 뚝 떨어지는 맛이 없다고 고충을 얘기하는 분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 때는 환율이나 우리나라 물가 등을 종합해서 비교하면 일본은 살이 와들와들 떨릴 정도로 모든게 비싼 나라였습니다. 

그럴때 오신 분들을 안내하여 가장 성공적인 평가를 얻은 곳이 있으니 바로 규동체인 요시노야(吉野家)였습니다. 값도 300엔 정도라서 원으로 환산해도 부담이 없었고 김치대신 붉은 생강절임을 잔뜩 얹고 고추가루(七味)를 듬뿍 뿌려 먹으면 한국음식 맛이 난다고 다들 좋아하였습니다. 실제로 50엔 했던 쯔케모노(漬物;야채절임)를 추가로 시켜서 고추가루를 뿌리면 김치 비슷한 맛이 난다고도 했습니다. 지금은 규동체인도 그렇고 이자카야도 어딜가나 기무치를 파니 격세지감을 느낍니다만. 당시 도쿄 출장을 한 달에 한 번 꼴로 자주 오던 저와 친한 선배 한 분이 계셨습니다. 몇 년 뒤에 제가 한국에 갔을 때 만나 나누던 대화중에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선배: 소고기 덮밥이 일본말로 오오모리지. 네가 처음 가르쳐주어서 난 출장가면 맨날 그것만 먹었어. 값도 싸지만 내 입맛엔 그게 최고로 맞았어
밥과술: 형, 오오모리(大盛り)는 곱배기란 말인데? 
선: 엉? 난 맨날 가서 오오모리 구다사이 그러고 시켰는데?
밥: 그게 곱배기 주세요, 그런 말이야.
선: 그럼 일본말로 소고기 덮밥은 뭐라 그래?
밥: 규동(牛丼)이라고 해요.
선: 그렇구나... 처음에 출장갔을 때 네가 여기저기 데려갔잖아. 근데 그 집에 두 번 갔을거야. 내가 맛있어 해서.
밥: 그랬던 것 같애요.
선: 그 때, 니가 '오오모리 구다사이' 그래서 외웠지. 쉽잖아.
밥: 형이 양이 크니까 곱배기를 시킨거지.

그당시 선배는 약 0.1톤에 육박하는 체중이었습니다. 지금은 날렵하게 80킬로 초반입니다. 

선: 오, 그랬었구나, 난 지금까지 그 음식이름이 오오모린줄 알았어. 근데 한번도 실수안하고 잘 먹고 다녔네. 
밥: 그러네요. 그 집은 메뉴가 그거 하나니까 오오모리 그러면 규동 곱배긴줄 알았겠죠. 
선: 게다가 그 집은 일본말 안통해도 편해서 좋아. 들어가 앉아서 '오오모리 구다사이' 그러면 끝. 돈은 천 엔짜리 한 장 내면 알아서 거슬러 주고. 저녁에 맥주 한 잔 곁들이고 싶으면 '비루 구다사이' 그러면 되고. 야, 그러고보니 지금까지 엉뚱하게 알고도 실수 없이 잘 다녔네. 그 집 신세 참 많이졌다. 근데 그 집 이름이 뭐냐?
밥: 엥? 요시노야지요. 그것도 모르고 어떻게 다니셨어요?
선: 이름이 뭔 필요가 있어? 주황색 로고보고 찾아들어가면 되지. 사방천지 역마다 한 두개 씩 있는데. 맞다 그러고보니 조그맣게 영어로 그렇게 써져있는 것도 같더라.

우리는 한참이나 낄낄대며 즐거워했습니다. 선배와 제가 모두 20대이던 시절 이야기였고, 위의 대화를 나눈 것은 우리 둘이 삼십대 초반이었던 때 였습니다. 저는 규동하면 요시노야가 생각나고 요시노야하면 그 때 일화가 생각납니다. 해외여행이 보편화 되기 전 이야기입니다. 해외여행을 가도 이것저것 구경가서 사진찍는데 열심이고, 현지의 맛있는 음식을 즐긴다는 여유가 지금보다 훨씬 덜 할 때였고 라면, 고추장 이런거 챙겨가지고 나가는 사람들이 많았던 시절이었습니다. 전반적으로 한국인의 입맛이 낯선 음식에 덜 열려있었던 시절이라 하겠습니다. 

요새 트위터나 인스터그램을 비롯하여 각종 SNS를 보면 젊은 세대들은 참들 잘들 먹고 삽니다. 아니, 매일 잘먹고 사는게 아니니 정확하게 표현해서 참 잘들 먹을 줄 알고 삽니다. 돈이 없거나 시간이 없어서 그렇지, 몰라서 못먹는 것 같지는 않다는 이야깁니다. 돈을 아끼고 아껴 저가 항공사를 골라 여행도 다니고 맛있는 것도 골라먹고 오고 하는 걸 보면 여건이 나아지기만 하면 얼마나 더 알차게 살까 싶기도 합니다. 그래서 더욱 젊은 세대들이 취업걱정없이 노력한 만큼 돈을 벌고, 번 돈으로 즐거운 삶을 살수 있도록 우리사회가 빨리 잘 변화하고 발전하기를 바랍니다. 되돌아 보면 짧은 세월에 참 많이 변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낙관합니다. 한국사람의 식생활은 조금씩 나아지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발전할 것이라고요. 

SNS를 보다보면 간혹 한국 외식산업의 현황에 대해 비난하고 한국음식 자체에 대하여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접근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습니다. 비평도 발전을 위하여 생산적인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지만 간혹 이건 아닌데 싶은 경우도 있습니다. 서양의 조리법과 영양학을 기본으로 놓고 한국은 이건 이래서 안되고 저건 저래서 못쓴다는 이론은 모든 한국음식은 음양오행을 바탕으로 만들어졌고 그래서 세계최고라는 이야기만큼이나 황당하게 느껴집니다. 과격해야 먹힌다고 믿는 선정주의를 바탕에 깔고, 의견이 다르면 무조건 내가 옳고 너는 틀렸다라는 근거없는 오만함에서 나온게 아닌가 의심이 가기도 합니다. 오늘은 요시노야 이야기를 하려고 포스팅을 하기 시작했는데 갑자기 하루살이 이야기가 생각이 나서 잠시 옆길로 샙니다.   

하루종일 눈이 펑펑오는 겨울날에 하루살이가 태어났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는 세상은 이렇게 영원토록 눈이 오는 거라고 여기며  하루라는 시간의 기나긴 일생을 마치겠지요. 푸른 하늘에 뭉게구름이 피어오르는 더운 여름날, 맴맴 귀가 따갑게 울어대어 여름을 더욱 여름스럽게 만들어주는 매미의 일생은 일주일이라고 합니다. 근데 하필이면 재수없이 장마철에 허물을 벗은 매미가 있다면 아, 우주는 이렇게 주룩주룩 비가 오는 거로구나 하고 여기다 삶을 마감하고 가지 않을까요.

우리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살아가며 쌓여가는 제한된 경험과 습득한 지식으로 세상을 보고 판단하고 삽니다. '장님 코끼리 만지기'라는 속담이 그래서 나온거 아닌가 싶습니다. 이 옛 속담을 요즈음 민감한 '차별'의 관점에서 시각에 장애가 있는 분들을 비하한다 이렇게 볼 것이 아니라, 그냥, 눈 코 귀 등 열려있는 감각기관에 제약이 가해지면 그만큼 사물의 이치를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다는 뜻으로 이해하고 사용하겠습니다.  

설령 눈 코 귀가 모두 활짝 열려 있다고 해도 거기에서 들어오는 정보를 받아들이는 머리가 막혀있으면 분석이 안되고, 또 머리가 제대로 기능을 하여도 분석한 내용을 받아들일 마음이 닫혀있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마음의 눈'을 여는게 중요하다고 하는 것 이겠지요.

아까 나온 하루살이나 매미와 달리, 남들이 겪은 경험과 축적한 지식을 대화를 통해서 동세대와 공유하고 또 학습을 통하여 다음 세대에게 전승할 수도 있다는 것이, 인간이 다른 동물보다 뛰어난 점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장마철 매미가 사람이었다면 전수받은 지식을 통해서 '아 원래 햇살 쨍쨍나는 여름날도 있다는데, 난 재수없게 장마철에 태어났나보다ㅠㅠ 아직 허물을 안벗은 동생들이라도 좋은 날씨에 나왔으면...' 뭐 이럴수도 있지 않을까 상상해 봅니다. 

실제로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문명의 혜택은 이러한 지식의 집적을 통하여 가능했던 과학기술의 발달에 힘입은 바가 큽니다. 하지만 그런 혜택을 누리는, 그러니까 그만큼 편리해진 생활에 비례해서 행복도 그만큼 늘어났다고는 할 수가 없지요. 생활이 편리해 졌다는 것은 몸이 편해진 것이고, 행복은 결국은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니까요. 

몸이 편하고 그래서 마음도 편안하고 즐거워야 우리는 진정으로 행복을 누릴 수가 있는 건데, 행복의 주체는 마음이니까 아쉽게도 행복은 아끼는 가족이나 사랑스러운 자식에게 통장이나 부동산 넘기듯이 증여하거나 상속할 수가 없습니다. 이건 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식은 집적할 수가 있지만 지혜는 집적이 되지 않습니다. 

누구나가 살아가면서 제로에서 시작하여 키워가는게 지혜입니다. 진리를 찾아 수행하는 수도사나 승려에게 구도의 길이 중세보다 오늘날 더 쉬워졌다고 할 수 없을 겁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의 피를 받은 그리스 사람들이나 중국 산동성 곡부지방에 모여산다는 공자의 후손들이 우리보다 콩알만큼이라도 더 지혜로와야 할 이유가 없는것도 바로 그래서 입니다. 

카톡, 트위터가 있어서 하루에 수십번이라도 원할 때마다 순식간에 사랑하는 이에게 대화와 문자를 보낼 수 있으니, 오늘날의 젊은이들이 전화도 없이 편지만 주고 받던 시절의 청춘보다 사랑의 마음을 더 잘 전달하며 사느냐 하면 그건 아니라는데 동의하실 겁니다. 옛날보다 실연의 아픔도 덜 겪으며, 사랑의 열병을 피해다니냐 하면 그것도 아니라고 봅니다. 하긴 생각해보면 지식의 집적마저도 사회전체가 공유하는 간접지식의 축적일 뿐이지 체화된 지식은 개인개인이 쌓아가야 하니까 그 한계가 명백한 겁니다. 저명한 수학자나 영문학자가 세상을 하직하면서 안타깝게도 수험공부에 쩔쩔매는 자식, 손주들에게 머리속에 든 지식은 하나도 물려주지 못하는게 어찌보면 다른 사람들에게는 차라리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공평해지는 면도 있으니까요. 아, 얘기가 꼰대처럼 흘러가는군요.

하기야 저는 블로그를 쓸 때 한국이라는 표현보다는 우리나라라는 표현이 더 자주 튀어나와 자주 백스페이스바로 지우고 다시 쓰곤 합니다. 요즈음 분류법으로 보자면 꼰대입니다. 아저씨과 개저씨속 꼰대종 쯤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제 스스로는 그렇게 분류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물리적인 나이는 피할 수 없는거니 노인과로 진입할 대기순번을 타 둔 명백한 아저씨과 입니다. 그런데 혼자 다 내맘 같겠거니 여기고 자꾸 젊은 사람들 노는데가서 소통하고 싶어하니 눈치없는 개저씨속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의식하지 않고 이야기를 하다보면 툭하면 내가 젊었을 땐, 내가 옛날엔, 이딴 소리가  튀어나오니 영락없이 꼰대종에 속한다고 봅니다. 이렇게 된 바에야 기꺼이 꼰대가 되는게 차라리 나을 것도 같습니다.  

그동안 지내온 나날을 꼽아보면 젊은 세대에 비하면 하루반살이나 이틀살이로 불려도 될만큼 더 먹고 더 마셨노라 말할 수 있겠지요. 그만큼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도 많고, 가만히 보고만 있자니 근질거려서 참견하고 싶은 상황도 많습니다. 이게 다 오지랍인데 전형적인 꼰대의 증상인 것 같습니다. 블로그 어디에선가도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저는 우리나라의 젊은 세대에게 늘 미안하고 염치가 없는 마음입니다. 조금이라도 마음의 빚을 덜겠다는 심정으로 지난 가을부터 올 봄에 걸쳐 국내에 있을 때는 광화문 집회에 열심히 나갔습니다. 촛불 한개 만큼의 성의라도 주려고 나갔다가 더 많이 받아온 형국이 되었습니다. 감동받고 치유받았습니다. 지금 새정부가 들어서서 하는 걸 보면 즐겁기도 하고 기대도 많이 됩니다. 저도 제 할 일을 열심히 하겠습니다. 블로그도 꼰대스러움 이런거 신경안쓰고 쓰겠습니다.  

오늘 이야기로 돌아옵니다. 일본의 규동 체인점 요시노야(吉野家) 이야기를 두세번에 걸쳐 쓰려고 합니다. 소고기 덮밥 하나로 연간 매출 1조원을 넘긴 브랜드 입니다. 후발 주자인 스키야(すき家)는 규모가 2조원 가까이 되고 또 다른 경쟁업체 마츠야(松屋)도 9천억 가까이 매출을 올립니다. 규동 한그릇도 들여다보면 우리가 배울게 많습니다. 요시노야 이야기 뒤에도 모스버거 이야기, 이자카야 체인 와타미(ワタミ) 이야기, 스시 이야기 등 하고 일본에 관해서 하고싶은 이야기가 많네요. 커피이야기도 끝나지 않았구요. 


이야기가 이상한데로 흘러서 길어져, 오늘은 규동이야기는 꺼내지도 못하고 맺어야 하겠네요. 다음번에 계속 됩니다. 좋은 주말 보내세요~


나으 음식일기 (23): 아이스크림, 하드, 아이스케키 나의 반백년 음식일기

사람의 기억이란게 참으로 제멋대로인지라 믿을만한게 못된다고 느낄 때가 있다. 특히 유년 시절, 청소년 시절은 왜 이리도 길었던 것 처럼 느껴지는지. 아니 실제로 시간이란게 현재의 물리학으로는 해석이 불가능하여, 같은 일년을 젊어서는 더 길게 사는거라고 믿을 때가 있다. 일년 눈 딱감고 공부하면 더 좋은 학교간다는 말의 일년은 영겁의 시간같지 않았던가. 대학에 간 남자아이들은 2년 갔다오면 자기가 알던 세상은 모두 사라지고 싹 바뀌어있을 거라고 절망하며 군대를 갔다.

아이스크림 하면 느낌으로는 제일 많이 먹었던게 해태 부라보콘이 아니었나 막연히 생각했다. 수십년동안 먹은 느낌인데 곰곰히 되짚어보니 고등학교 3년 대학교 4년해서 길어야 7년 남짓한 세월이었다. 하겐다즈는 손꼽아보니 먹기시작한지 30년이 넘었다. 어느나라에 있어도 하겐다즈는 사먹을 수 있었으니 먹은 양도 훨씬 많을 것이다. 그런데 해태부라보콘이 더 강력하게 기억에 자리잡고 있으니 신기한 노릇이다. 더구나 요새는 잘 먹지도 않으면서. 

"열두시에 만나요~ 부라보콘! 둘이서 만나요 부라보콘. 살짜쿵 데~이트 해태 부라보콘!" 대충 이런 가사의 CM송이 대단히 유행했었다. 좀 야하게 개사가 된 버전도 있었다. 나는 부라보콘하면 사간동에 있었던 프랑스문화원에서 프랑스영화를 보는 날 바로 옆에 있던 구멍가게에서 라면을 먹고나서 부라보콘을 사먹었던 게 제일 인상에 남는다. 식사시간이 안맞아 라면을 안먹어도 부라보콘은 먹었다. 그 때 사먹었던 부라보콘은 참으로 맛이 좋았다. 영화를 좋아하는 친구들과도 가고 데이트 비슷하게 여학우들과도 가고 여자친구가 생긴 뒤 본격 데이트로도 가고 아무튼 여러사람과 갔었다. 누구랑 가던 부라보콘을 하나씩 들고 까서 먹는 건 내가 정한 리추얼처럼 되어버렸다. 여학생이랑은 그럴듯한 비주얼이 나오는데 사내녀석 둘이나 셋이 부라보콘을 먹으며 누벨바그에 장삐에르 멜빌이 어쩌구 끌로드 샤브롤이 어쩌구 하는 모습은 지금 상상해보니 좀 미스매치같기도 한데 그 때는 그냥 즐거웠다. 확실하게 기억나는건 르네끌레망의 '금지된 장난'을 보고나서 아련한 마음이 가시기 전에 라면을 먹고 부라보콘을 먹었던 순간이다. 마지막 장면의 '미셸! 미셸!'하는 여주인공의 목소리가 귀에 여운으로 남아있던 상태에서 콘의 껍질을 벗기던 순간도 생각이 난다. 그런데 이상하게 영화는 생생하고 아이스크림을 먹은 것도 기억하는데 막상 누구랑 함께 였는지는 생각이 나지않는다. 상상으로 누군가를 대입해보면 다 그 자리에 있었던 것 같다. 참 기억이란게 묘하다.  

아이스크림이란게 우리나라의 식품법관련 무슨 규정에 따르면 유지방이 몇퍼센트 이상이라야 진짜 아이스크림이라 부르고 그 이하면 빙과류에 속한다고 한다. 찾아보면 금방 알겠지만 추억을 깨기 싫어 지금은 찾지 않기로 한다. 그토록 맛있었던 부라보콘이 빙과류였을지도 모른다는 걸 확인하고 싶지않아서이다. 이 분류를 따르자면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진짜 아이스크림'을 먹어본 건 중학교 1학년 때 안암동에 사는 친구네 집에서였다. 아버지가 정치쪽에 계신다는 집 아들이었는데 어마어마하게 잘살았다. 그 친구 어머니는 학교를 올 때면 본 적이 없는 커다란 세단을 타고 오셨다. 아이들이 뭐냐고 물었고 친구는 심드렁하게 '뷰익 8기통이야'라고 대답했다. 걔네 집은 2층 슬라브 양옥이었는데 들어가보니 복도와 거실에 각종 외국제 장식품이 그득하였다. 화장실이 2층에도 있는 것도 신기했고 하얗게 반짝이는 도자기같은 수세식 양변기에도 주눅이 들었다. 집안전체에서 갑자기 웅웅 소리가 나서 물었더니 온도가 내려가서 보일러가 돌아가는 소리라고 했다. 가을이었다. 연탄을 때지않고 집안을 데우는 보일러라는 시스템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일하는 누나가 간식이라고 라면을 끓여주었는데 맛있는 포기김치가 나와서 놀랐다. 그 때까지 포기김치는 김장을 해서 겨울철에나 먹는거고 봄부터 가을까지는 풋김치, 열무김치, 깍두기 이런걸 먹는 걸로 알고 살았기 때문이다. 저녁을 먹고나니 투명한 유리그릇에 아이스크림이 동그랗게 담겨나왔다. 핑크빛이 도는 아이스크림을 입에 떠넣으니 딸기향이 입안에 확 퍼지는데 황홀했다. 진짜로 딸기가 들었는지 딸기씨도 씹혔다. 여태까지 알았던 아이스크림이라고 먹었던 것과는 다른 세계의 맛이었다. 

다 먹고 나서 한참동안 황홀경에서 벗어나지 못한 내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친구가 말했다. 더 먹을래? 놀라움의 연속에 기죽지 않으려고 태연한 체하며 자존심을 지키려던 나의  노력은 이 말 한마디에 무너졌다. 응! 일 초의 사이도 두지않고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는 나를 부엌으로 데려가 엄청나게 커다란 냉장고를 열더니 네모난 상자를 꺼내며 설명했다. 한 달에 두 번씩 용산 코미서리에 가서 사온다. 내가 물었다. 코미서리가 뭔데? 미군피엑스야. 미군피엑스란 것도 뭔지 몰랐지만 그냥 가만있었다. 아이스크림이 들어있는 상자에 써진 글자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Foremost. 

그리고 몇년 뒤 한국에 부라보콘이 나왔고 뒤이어 일반인을 상대로 바로 그 퍼모스트도 나왔다. 거기서 나온 쵸코바는 정말 맛이 좋았다. 비싸서 쉽게 사먹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지만. 그리고 딸기 쵸콜릿 바닐라 등의 제품도 나왔는데 중학교 일학년 때 부자친구네 가서 먹어본 것과는 맛이 다른 것 같았다. 퍼모스트가 꽤나 흔해진 것 같더니 어느 순간에 빙그레가 되었다. 


세월이 흐른 뒤에 알게된 사실인데, 당시 한국이 가난하던 시절 일부 '특권층'들은 미군부대를 드나들며 미군부대의 PX나 식료품 등을 살 수가 있었다고 한다. 데칼이라고 해서 자동차 범퍼에 붙이는 출입증이 있었는데 그게 붙은 차량을 타고 들어가서 골프도 치고 미군장교클럽에서 식사도 하고 그랬다고 한다. 자세한 범위는 모르지만 국회의원 장차관급 고위공무원들이 미군이 '베푸는 시혜'의 대상이 아니었나 싶다. 특권의 상징인 그 데칼을 받으려고 로비와 청탁과 사바사바가 치열했다고 들었던 것 같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아이스크림이 나오기 전에 최고급의 빙과는 뭐니뭐니 해도 삼강 하드였다. '하드'라는게 하드 아이스크림의 준말인데 말과는 달리 되게 부드러워서 좋았다. 하드가 나오기 전까지는 딱딱한 얼음 아이스케키가 유일한 빙과였으니 하드는 '부드러운 아이스케키'라고 생각했다. 국민학교 시절이라 하드가 딱딱하다는 뜻인줄 알리도 없었고. 아주 어려서 삼강하드를 먹어보고 이미 그 맛에 충분히 반했는데, 어느 순간에서부터인가 끝부분을 쵸코렛에 살짝 담갔다 뺀 게 나왔으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얄팍하게 바르다 만 쵸코렛 코팅이었지만 충분히 기가 막혔다. 물가가 자고나면 뛰던 시절이라 많은 변동이 있었겠지만 내 기억에 남는 가격은 케키 오원에 세개, 하드 오원에 한개 였으니 그 시점이 몇년도 였는지 궁금해 진다.  


옛날에는 극장에 냉난방 설비가 좋지 않았다. 냉난방설비가 되어있어서 신문광고에 '냉방완비' '난방완비' 이런 문구가 들어가 있었던 곳은 아주 소수였던, 일류극장'으로 불리던 개봉관에 한정된 이야기였다. 2류 3류라고 불리던 재개봉관 재재개봉관에서는 겨울에 연탄 난로를 피웠는데 어떤 곳에서는 영화가 돌아가는 도중에 일하는 아저씨가 연탄불을 갈러 들어오기도 하고 그랬다. 이런 곳에서 여름에 냉방이란 생각할 수도 없던 시절이라 컴컴한 극장안은 찌는 듯이 더웠다. 그래도 사람들은 좋다고 가서 영화를 보았다. 스크린쪽으로 커다란 대형선풍기가 두개 놓여서 웅웅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곳은 그래도 양반이었다. 그래서 영화가 끝나고 다음회가 시작하기 전에 불티나듯 잘 팔리는게 아이스케키와 하드였다. 

영화가 끝나면 엔딩롤이 올라가기도 전에 불이 켜지면, 케키통을 맨 아이들이 좌석사이 통로에 숨어있다가 벌떡 일어나 일제히 '케키나 하드~' 이렇게 소리치며 경쟁적으로 얼음과자를 팔았다. 극장안에서 케키나 하드를 파는 것도 아마 이권이었을 것이다. 어린아이도 있었고 머리가 제법 굵은 아이도 있었다. 자기 밑에 몇명 거느림직 한 큰 아이는 굵고 낮은 목소리로 천천히 '께에끼나 하아더~' 이렇게 소리를 냈다. 이건 어느 극장에서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기억이란게 믿을게 못되긴 하지만. '하드'를 '하더'라고 발음하는게 뭔가 내공이 있어보였다. 아래도 구글에서 찾은 사진인데 두번째 사진은 영화 '아이스케키'의 한장면이다.(아래 사진3장은 http://tpholic.com/xe/9061571님의 블로그에 실린 것. 덧글을 달 수가 없어 양해를 구하지 못한채 퍼왔음) 


아이스케키는 뭐니뭐니 해도 팥이 들어간 게 제일 맛이 좋았다. 그걸 당시에는 '앙꼬 아이스케키'라고 불렀다. 팥앙금의 맛이라서 앙꼬라고 불렀을 것이다. 그 때는 냉장고가 보급이 안되어 얼음수요가 많았는지 동네마다 얼음공장이 있었다. 학교가는 길에도 아이스케키 공장이 있었는데 친구들이랑 하교길에 그 앞에 멈춰서서 한참씩 구경을 하곤 했다. 옛날엔 아이스케키를 사먹을 때 돈만 받는게 아니라 고물같은 걸 받는 장사도 있었다. 더운 여름날 아이스케키는 너무나 맛이 좋았다. 어른들은 '대장균이 득실거려서 많이 먹으면 배탈난다'고 했는데 아이들은 배탈이 날만큼 많이 먹어보는게 소원이었을 것이다. 

더운 여름에 열기를 조금이라도 식히려고 아이스케키도 먹었지만 그때는 냉차장수라는 직업도 있었다. 리어카에 실린 투명한 통에 커다란 얼음이 들어있었고 갈색 액채가 채워져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보리차에 설탕을 탄 맛이었다. 아마 사카린같은 감미료였겠지만. 거기에 미숫가루를 풀어주는 경우도 있었던 것 같다. 의료용이 아니었을까 싶은 투명한 고무호스를 타고 흘러내리는 냉차를 유리컵에 넘치지않게 딱 분량에 맞추어 담아주면 손님은 그자리에서 벌컥벌컥 마시고 컵을 돌려준다. 그러면 냉차장수는 옆에 마련해둔 설거지통에 꿀쩍꿀쩍 그자리에서 헹궈낸다. 그러면 다음 손님이 마실 새 컵이 되는거다. 평소엔 잊고 살다가 어쩌다 가끔씩 냉차의 맛이 그리울 때가 있다.

팥앙금 아이스케키가 제일 맛있었던 건 혜화동 로터리에 있었던 '아카데미 빵집'에서 파는 것이었다. 라면 한그릇에 20원 할 때 한개 20원이었으니 꽤나 비싼 편이었다. 팥앙금이 듬뿍 들어서인지 딱딱하지 않고 적당히 부드러웠다. 지나치게 달지도 않고 맛이 고급스러웠다. 지금 어디가면 비슷한 맛의 것을 먹을 수 있을지 궁금하다. 요새 파리바게트의 팥 아이스케잌을 가끔씩 사먹게 되는 건 아마도 아카데미 빵집의 그것을 그리워하는 마음에서 일 것이다. 서울에 돌아가면 진짜 오랫만에 부라보콘을 사먹어야 겠다.  

 

우리도 맛있는 커피를 먹자(2): 일본 도토루 이야기-2 술/커피이야기


커피의 향기에는 저항하기 힘든 매력이 있습니다. 옛날식 다방이든 요즘 유행하는 현대식 커피숍이든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에 풍겨오는 커피향을 맡으면서 마음은 벌써 기분이 좋아집니다. 원두커피만은 못하겠지만 인스턴트도 인스턴트 나름대로의 향이 있고 그 또한 강렬하지는 않지만 독특한 매력이 있습니다. 역사가 오래된 유럽의 카페도 그렇고 나름 짧지않은 역사를 가진 일본식 카페도 모두 음식, 맥주, 위스키 등을 팝니다. 그런데 이름은 카페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다른 식품으로 버는 매상이 커피를 능가하는 집도 꽤 될 듯 합니다. 별거 아닌거 같지만 커피가 그만큼 그 가게의 대표선수격이 될만큼 존재감이 강력하다는 이야기겠지요. 

커피는 드립할 때, 마시려고 컵가까이 입을 가져갔을 때, 여러 단계에서 향을 즐길 수 있지만 저는 원두를 분쇄할 때 나는 향기가 제일 좋습니다. 좀 과장하자면 때에 따라서는 미치도록 좋은 향기가 주위에 퍼집니다. 그리고 드립할 때 한번 더, 마실 때 또 한번, 참 여러번에 걸쳐 즐길 수가 있으니 집에서 마시는 커피도 참 좋습니다. 물론 로스팅을 할 때에도 대단히 좋은 향이 나지만 이는 아무나 경험할 수 없는 냄새이므로 넘어갑니다. 

저는 한 때 꽤 오랫동안 커피밀을 여러개 사다놓고 아침마다 신선한 원두를 갈아서 한잔을 마시고 하루를 시작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독신때였는데 혼자 상상하기를 결혼을 하면 아침햇살이 눈부시게 들어오는 거실에서 나는(배우자는) 원두를 갈아 커피를 천천히 내리고, 배우자는(나는) 노릇노릇하게 토스트를 구워 버터를 발라 맛있게 아침을 먹겠지하고 동경하였습니다. 계란은 하루는 부드럽게 스크램블로 하루는 서니싸이드업으로 또 어쩌다 반숙으로 삶아서 작은 숟가락으로 퍼먹는 아침. 토스트도 머핀, 베이글, 와플로 바꾸어가며 먹고. 잘못하여 계란이 깨지면 그참에 프렌치토스트도 해먹고. 참 야무진 상상을 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원래 잘 먹지도 않는 아침식사의 메뉴를 한식이 아니라 양식으로 상상을 한 건 모두 치명적인 커피향에서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커피향이 있는 아침, 그걸 동경한 거지요. 

결론을 얘기하자면, 막상 결혼을 하고 나서는 일어나면 출근준비에 바쁘고 애기가 생기고는 생활의 중심은 육아로 옮겨가고 해서 우아한 커피가 있는 모닝은 별로 기억에 없는 것 같습니다. 신선한 원두를 천천히 밀에 넣고 손으로 돌려 갈아 정성스레 드립을 한 뒤에 코로 들어오는 커피내음을 즐기는 생활은 독신일 때가 훨씬 더 실현도가 높은 것 같습니다. 

커피향을 이야기하다보니 개인의 과거를 꺼내게 되었네요. 커피향 이야기를 하게 된 건 좋은 커피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였습니다. 위의 사진은 구글 검색에서 찾다가, 아 맛있겠다 향이 좋겠다 하고 느끼게 되는 사진이라 골라본 겁니다. 남미의 어느 커피업자 홈피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커피는 이디오피나 케냐등 아프리카에서도 나고 인도네시아에서도 납니다. 요새는 품질은 아라비카보다 떨어지는 로부스타종이라고는 하지만 양으로는 브라질에 뒤이어 베트남에서 많은 양이 생산된다고 하지요. 하지만 역시 멕시코 과테말라 온두라스 등 중미에서부터 자마이카 도미니카 같은 카리브해 국가, 브라질 콜롬비아 브라질 베네주엘라 등 남미국가들이 세계 모든 커피중독자에게 커피마약을 공급해주는 주생산국입니다.


열매는 우리가 직접 보기는 힘든데 위와 같은 모습이고 아래는 대형 플랜테이션이 아닌 소규모 가내수공업 수준에서 원두를 선별하고 건조시킨 모습인 듯 합니다. 보기에 마음이 푸근해져서 구글에서 골라보았습니다. 아래는 자루에 담은 커피 원두 사진입니다. 생원두가 아니라 로스팅을 한 뒤의 모습이군요. 그 아래는 로스팅을 하는 기계와 그 앞에서 일하는 사람의 모습, 그리고 맨아래 커피원두를 로스팅한 상태를 나타낸 사진입니다. 엷게 로스팅한 상태에서 딥로스트까지의 색깔의 차이가 일목요연하게 보이네요. 

돌고 돌아서 오늘 하려고 했던 일본의 체인점 '도토루'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목적은 하나입니다. 우리 한국사람들도 같은 돈 냈으면 좀 맛있는 커피를 마시고 살자, 입니다. 지난번에도 썼지만 일본은 우리보다 훨씬 일찍부터 커피를 직접 수입해서 즐긴 역사가 있습니다. 일본은 현재 일년에 원두를 약 50만톤 가량 수입합니다. 우리나라는 몇년전부터 갑자기 늘어나기 시작해서 이제 일년에 약 15만톤 정도 수입합니다. 일본의 1/3정도인데 이도 무시못할 양입니다. 인구비례로 보면 일인당 소비량이 일본의 3/4 정도인데 요새 추세로 보아서는 곳 일본의 소비량과 비슷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렇게 많이 커피를 마시는데 후발주자이다보니 일본만큼 좋은 조건으로 구입을 하기에는 역사와 환경이 아직은 못따라 갈 수도 있겠습니다.

일본의 유명종합상사 마루베니(丸紅)는 커피수입의 큰 손입니다. 일년에 15만톤 이상을 수입한다고 하니 우리나라 물량을 넘어서는 양을 한 회사가 취급하는 겁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일본에는 커피를 다루는 종합상사말고도 커피만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커피전문상사들이 여럿있습니다. 한 예를 들어, 우에시마(上島)브랜드로 커피숍 체인점도 운영하는 UCC 브랜드 회사도 실제로는 커피를 전문으로 수입하여 공급하던 전문회사 였습니다. 이 회사는 고급 커피를 확보하기 위하여 일찌기 80년대 초부터 자마이카 '블루마운틴'지역에 직영농원을 개설하였고 하와이 '코나'지역에도 코나커피를 생산하기 위하여 직영농원을 개설하였다고 합니다. 

세라드커피, 오션상사, 가네마츠, 와타루 등 찾아보니 커피수입 전문회사들이 많이 있습니다. 커피전문회사들은 일본스페셜티커피협회를 만들어 강습이나 교육도 하고 전시회등 이벤트도 하고있네요. 스페셜티 커피란 원두에서부터 추출한 커피의 향과 맛에서 뛰어난 고품질의 커피를 의미하는 것으로 정확한 기준과 정의는 좀 애매한 것 같기도 합니다만 아무튼 회원이 1500을 넘습니다.

이렇게 일본의 예를 좀 자세히 드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일본은 우리나라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많은 커피를 수입하였고 하니 우리가 따라가기에는 아직은 불리한 상황이다, 라는 걸 바탕으로 어떻게 하면 이 간극을 빨리 극복하여 같은 값으로 맛있는 커피를 마실수 있을까 방법을 모색하기 위함입니다. 무엇이든 변화를 추구하려면 첫단계는 현실인식이니까요. 

세계에서 생산되는 커피원두가운데 상위 5퍼센트는 모두 일본이 사가고 상위 6퍼센트부터 20퍼센트까지의 상당부분도 일본이 수입한다는 보도와 통계를 몇년전에 본 적이 있습니다. 은근히 약오르는 통계입니다. 요즈음은 유럽과 미국에서도 Gourmet coffee 붐이 불었는데 어떻게 변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일본에는 직접 로스팅을 하는 조그만 커피점들이 옛날부터 꽤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고품질의 원두- 개성있는 로스팅- 바리스타의 성의있는 추출- 좋은 걸 알고 찾는 소비자, 이런 선순환구조로 커피문화가 발달한 것이라고 봅니다. 한국은 소비자가 맛있는 커피를 알고 고품질의 커피를 요구하는데서 시작하는게 타당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소비자가 맛을 알고 찾으면 장사하는 사람들은 그러지 말래도 더 팔기위해 좋은 품질의 것을 경쟁적으로 제공할 테니까요. 더도 덜도 말고 한국편의점의 천원짜리 커피가 일본 편의점의 백엔짜리 커피만큼의 수준이 되고 2천원짜리커피가 2백엔짜리 도토루 커피만큼만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램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커피로 성공한 기업 도토루의 이야기를 간단하게 소개해볼까 합니다. 


위는 제가 내용이 재미가 있어서 블로그에서 공유를 하려고 모아둔 책들입니다. 가운데 보이는게 <도토루 커피 '이기느냐 죽느냐'의 창업기>라는 책으로 창업자가 쓴 책입니다. 그 오른쪽으로 얼핏 보이는게 규동으로 유명한 '요시노야(吉野家)'의 회장이 쓴 책 입니다. 왼쪽은 전국적으로 성업중인 이자카야 체인 '와타미(ワタミ)'의 성공을 다룬 책 입니다. 그 아래는 전생에 나라를 구하지 않았으면 이럴 수가 없을 것 같은 이의 저서입니다. 기회 될 때 마다 하나씩 소개를 하려고 합니다. 이 책을 읽어보면 공통적으로 느끼는게 음식사업에 대한 확고한 철학과 뚜렷하게 정립된 이념이 있다는 것 입니다. 오늘은 커피이야기니까 도토루 이야기만 합니다. 

저가 커피숍 체인 '도토루'가 처음 생겼을 때 업계에서는 회의적인 눈길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커피숍(킷사텐;喫茶店)의 평균가격의 반값으로 매겼으니 과연 얼마나 버틸까하는 생각에서 였겠지요. 창업자의 이름은 도리바 히로미치(鳥羽博道), 1937년생이니 올해로 80세가 됩니다. 그는 도쿄 근교 사이타마현 출신인데 학벌은 고교중퇴입니다. 아홉살때 어머니를 여의고 힘들게 살다가 학업을 단념하고 도쿄로 상경하여 취직한 곳이 커피숍입니다.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사장눈에 들었는지 스물이 안된 나이에 점장이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로스팅을 하는 거래선의 사장으로부터 브라질 커피농장에 가서 일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습니다. 

일본사회에서 감당해야하는 학력의 핸디캡도 있고 미지의 세계로 나가 자신을 던져보고 싶은 욕망 등의 이유로 브라질행을 결심합니다. 1959년 요코하마에서 '아르헨티나마루'라는 배를 타고 로스앤젤스, 파나마, 베네주엘라, 리오데자네이로를 거치는 42일간의 항해끝에 상파울로에 도착합니다. 이 여정을 자세히 소개하는 건, 힘들었겠지만 옛날에 배타고 다닐 땐 그만큼 낭만적이었겠구나 싶어서 입니다. 

그는 브라질에서현지 노동자들과 함께 어울리며 3년동안 현장감독을 하였는데 그동안 커피원두의 재배와 수확 건조 등 일련의 공정을 제대로 배우게 됩니다. 3년뒤 그는 네덜란드선을 타고 케이프타운, 아프리카, 모리셔스, 싱가폴, 홍콩을 거쳐 일본으로 돌아옵니다. 그 때가 그의 나이 24세입니다. 그는 그 때 왕복으로 돌았던 세계일주가 지구의 싸이즈를 몸으로 체험하며 자신의 세계관에 영향을 끼쳤다고 회고합니다.

그에게 커다란 전기가 찾아온것은 1971년 커피업계에서 처음으로 유럽시찰여행을 가게 되었을 때 거기에 참가하면서부터라고 합니다. 여정 내내 컬처쇼크의 연속이었다고 합니다. 무엇보다도 유럽에서는 커피가 생활에 밀착하여, 통근길에 아침을 먹는데 파리에서는 크롸상과 커피, 독일에서는 핫도그와 커피 이런 식으로 먹는게 놀라웠다고 합니다. 무엇보다 놀랐던 것은 파리에서 아침에 출근하는 회사원들이 줄줄이 커피숍에 들어가는데 카운터에 몇겹이고 둘러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광경이었다고 합니다. 안에 테이블도 비어있고, 밖의 테라스 석도 많이 비어있는데 왜 그럴까 신기하게 여긴거지요. 

알고 보았더니 같은 커피 한잔이 밖의 테라스석에서 마시면 150엔, 가게안의 테이블에 앉아서 마시면 100엔, 카운터에서 서서 마시면 50엔 이렇게 가격차이가 있더라는 겁니다. 여기서 그는 서서마시는 커피숍이 언젠가 커피숍업계의 최종형태가 될 것 이라고 감을 잡습니다. 도토루가 시작한 저가형 커피숍의 원형이 여기서 생겨난 것입니다.

그리고 독일에 가서는 원두를 갈아 일반소비자에게 파는 커피숍, 스위스에서는 커다란 로스팅공장의 규모 등을 보면서 일본에 도입할 가지가지 아이디어를 머리에 저장하고 돌아옵니다. 그리고 일본에 돌아와 자신의 로스팅공장을 시작한 뒤에 끊임없이 연구하고 개량합니다. 하와이에 자사 커피농장을 만든 도토루는 원두를 "한알한알 손으로 수확하여 외피를 벗긴 뒤, 하와이의 햇볕과 바람에 건조시킨다. 아침에 내다 펼치고 저녁에 들이는 공정을 일주일간 반복한다. 그 뒤 일년간 숙성과정을 거쳐야 도토루의 기준에 맞는 원두가 완성된다. 그리고 로스팅에 들어간다." (중략) "현재 도토루의 로스팅 시스템은 세계 제일이라고 자부한다".

그는 도토루에서 내는 핫도그인 '저먼독'이 탄생되는 일화를 소개하는데 이것도 감동적입니다. 독일에 가서 너무나 맛있는 핫도그를 먹어보고 그 소시지를 수입하려고 했는데 여러가지 규제로 어렵다는 걸 알게 됩니다. 그리고는 그 맛과 식감을 재현할 업자를 찾아헤매다가 한 집을 발견합니다. 그 전에 독일에서 먹어본 핫도그 빵을 재현하기 위해 빵업자를 데리고 독일에 가서 먹어본 뒤 재현에 성공합니다. 그리고 그 빵을 가지고 소지지공장을 돌아다녔다 합니다. 아무튼 그래서 생겨난 이 저먼독은 베스트셀러가 되는데, 저도 좋아합니다. 수십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다른 빵업자나 소시지업자로부터의 납품은 받지않는다고 합니다. 

이런 노력과 의지의 결과로 현재 일본의 도토루는 점포수 1350개에 연간 매출액이 한국돈으로 1조원이 넘는 체인점으로 성장하였습니다. 저는 일본의 커피숍문화를 바꾸고 저가에 맛있는 커피를 공급하여 커다란 성공을 거둔 이 브랜드의 이야기가 우리에게도 참고가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나라도 지방에도 서울에도 커피에 열정을 가지고 성의있게 커피를 내는 가게들이 늘어난다고 들었습니다. 퇴직하고 마땅히 할게 없으니 커피숍이나 하고 가볍게 진입하는 분들, 또 이런 사람들을 노리고 감언이설로 꼬이는 무책임한 프랜차이즈 업자, 이런 풍조에 진짜 커피맛을 알고 열정을 가진 분들이 진입하면 새바람이 불겠지요. 커피숍에 보다 싼 가격에 좋은 원두를 공급하는 수입상사, 로스팅을 잘하는 업자, 드립을 잘하는 점원들이 모두 모두 늘어나서 소비자들이 저렴한 가격에 맛있는 커피를 마시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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