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허리는 온통 메밀 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이효석 <메밀꽃 필무렵>
중고교시절 국어시간에 배우는 한국문학사에 나오는 '메밀꽃 필무렵'에서 메밀과 관련한 대목은 이 한문장입니다.
저도 하얀 메밀꽃이 넓게 핀 메밀밭을 낮에 자동차로 지나가며 한두번 보았을 뿐이라, 깜깜한 밤에 환한 달빛에 비친 메밀밭의 정경은 상상으로 짐작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기야 요즘같이 밤에도 사방천지가 환한 한국에서 달빛이 밝은 걸 알기가 쉽지 않지요. 어린시절 겨울방학에 고향에 내려가, 눈밭위로 보름달이 떠서 세상이 대낮같이 밝았던 걸 보았던 기억이 새삼 아련합니다.
소설의 무대는 강원도 봉평입니다. 장돌뱅이 주인공이 잊지못할 과거의 사랑의 추억이 담긴 곳인데, 그 상대의 여인일지도 모르는 아낙은 지금 멀리 제천에 가서 살고있더라, 그런 내용도 들어있습니다. 이 글을 쓰다 지도를 검색해보니 제천IC에서 중부 고속도로를 타고 올라가 영동고속도로로 갈아타고 가다가 장평IC에서 내리면 제천에서 봉평은 두시간 남짓에 간다고 친절하게 루트와 시간까지 알려주는군요. 직선거리로는 백킬로가 안되는 곳이 고향을 등지겠다고 멀리 멀리 떠나간 곳이던 시절이야기입니다.
아, 오늘은 메밀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생각나는 대로 써내려가는 포스팅입니다. 메밀에 대한 단상과 잡학 포스팅이라고나 할까요. 위의 그림은 조선말 풍속화가로 당시의 생활상을 많이 그려 훗날 사료로도 중요한 작품을 남긴 기산(箕山) 김준근의 작품으로 제목은 '국수누르는 모양'입니다. 가마솥에 물을 끓이고 그위에 얹은 국수틀에 반죽을 넣고 국수를 뽑아내는 장면입니다.
요즈음 같은 유압식 기계를 동원하지 않으면, 눌러뽑는 그러니까 '압출형' 제면방식은 힘이 많이 듭니다. 그래서 지렛대의 원리를 이용한 국수틀에 장정이 자신의 체중을 실어 뽑았던 것 같습니다. 밥과술도 어려서 겨울이면 동네사람들이 마을에서 공동관리하는 국수틀을 이집저집 돌아가며 걸어서 야식으로 메밀국수를 눌러먹은 기억이 있다고 지난 포스팅에 잠깐 밝힌 적이 있습니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타이어 갈때 자동차 들어올리는 '자키'같이 한쪽으로만 경사가 진 쇠톱니장치가 반죽을 넣는 실린더 위에 있어서 거기에 아주 긴 나무자루를 끼운 모양새였던 것 같습니다. 미리 사람수에 맞추어 그릇을 준비하고, 소박하지만 고명을 준비하고, 반죽을 둥글고 길게 잘라내어 놓은 뒤, 가마솥에 물이 설설 끓으면 누를 때가 된겁니다. 그러면 이건 역시하면서 제일 힘이 센 장정에게 사람들의 눈길이 갑니다. 오늘의 영광스러운 임무를 맡은 사람은 자랑스럽게 부엌에 둘러선 여인네들이 보는 가운데 불끈불끈 근육에 힘을 주어 국수를 누릅니다. 여름이면 웃통을 벗어 제껴 꿈틀대는 온몸의 근육을 보여줄텐데 겨울이라 팔뚝에선 핏줄만 보여주는게 아쉽습니다.
국수발이 시원하게 주르륵 내려와 끓는 물에 들어가면 긴 막대기로 한두어번 저었나 싶으면 얼른 꺼내어 찬물에 헹구는데 어릴적 기억이라 정확하진 않겠지만 일분이 채 안걸리는 것 같았습니다. 국수를 그릇에 담으면 금방 퍼내온 동치미 국물을 큰 국자로 부어서 어른들부터 후루룩 후루룩 먹기 시작합니다. 메밀국수는 기다렸다 다같이 먹는게 아니라 누르는대로 얼른 얼른 먹는걸 모두가 당연한 걸로 여겼습니다.
다시 그림으로 돌아갑니다. 저는 위의 그림을 기산이 어디에서 그렸는지 모르겠지만, 누르고 있는 것이 밀가루 국수가 아니라 메밀국수였을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조심스레 추측해 봅니다. 그 이유로 생각할 수 있는게 몇가지가 있습니다.
우선 메밀은 생육기간이 두달 반 정도로 짧아서, 키우는데 반년 걸리는 벼나 그 이상 걸리는 밀보다 재배하기가 쉽고 토질이 안좋은 척박한 토양에서도 잘자라서 구황식물로 재배했는데, 이는 세계적으로 공통된 현상이었습니다. 이번에 알게 되었는데 미국도 18세기 19세기에는 많이 재배하는 흔한 작물이었는데, 질소비료가 도입된 뒤로는 모두 옥수수나 밀로 대체되었다고 합니다. 1918년 4천평방킬로미터였던 재배면적이 요즈음엔 200평방킬로로 줄었다는 통계가 있네요.
이 메밀을 미국에 들여온 것도 토양이 척박하고 추운 주로 폴란드 헝가리쪽의 이민자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비료가 있어서 더 영양가가 높은 작물을 심을 수가 있다면 메밀을 심지 않았겠지요. 당시의 영양가가 높다는 것은 칼로리가 높다는 것으로, 요즈음의 기준처럼 칼로리보다는 필수 아미노산, 각종 미네랄, 비타민등이 많다는 것과는 다릅니다.
실제로 메밀에는 비타민 B1이 많아서, 일본 에도시절에 유행한 각기병을 치료하고 예방하기위해 메밀을 많이 먹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아무튼 이 메밀이 가지고 있는 특징 가운데 하나가 밀이나 보리에 포함된 글루텐이 없다는 겁니다. 잘 아시겠지만 글루텐이란 곡류에 들어있는 단백질 성분인데 반죽을 만드는데 찰기, 그러니까 점성을 주지요.
이 글루텐 성분의 함량에 따라 강력분, 중력분, 박력분으로 나누어 빵같은 건 강력분으로, 케잌은 박력분으로 등등 나누어 사용하는데 일본식당에서 뎀푸라를 튀길 때 보면 튀김옷을 만드는 밀가루를 묽게 갠 그릇을 얼음물에 띄워놓은 걸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이 글루텐 성분을 누르느라 차갑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어쨌거나 이 글루텐 성분이 없어서 메밀은 끈기있는 면발을 뽑아내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메밀 8에 밀가루 2의 비율로 넣어 반죽을 하기 쉽게 한 니하치(二八)소바라는게 있습니다. 순메밀로만 만든게 쥬와리소바, 그러니까 십할소바라는 것인데 집집마다 만드는 노우하우가 다르다고 합니다. 찾아보니까 메밀의 전분을 따로 '호화'하여, 그러니까 끈기있는 풀성분으로 만들어 반죽에 섞는 방법도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메밀로 만드는 소바는 거의 전부 반죽을 한뒤 칼로 썰어 면발을 냅니다. 그러니까 끈기가 없으면 면발을 내기가 어려운 것이겠지요. 우리나라는 다릅니다. 이제사 위의 그림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끓는 물에다 직접 압출을 하면 반죽에서 모자라는 끈기문제가 해결이 됩니다. 나오자마자 곧바로 익어버리니까요. 우리나라도 밀가루로는 칼국수를 만들어 먹지요. 압출하지 않아도 쉽게 반죽하여 칼로 썰어 면발을 만들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귀한 밀보다는 값도 싼 메밀을 국수로 만들어 먹느라고 위와 같은 국수틀이 필요하지 않았나 싶은 겁니다. 참고로 여름이면 웃통을 벗었을 수도 있을 텐데 땀흘리는 모습도 없고 해서...어디까지나 밥과술의 상상입니다만.
덧붙이자면 메밀은 엄밀하게 곡류가 아니라고 하네요. 먹는 소비자야 그게 생물학적 분류로 곡류냐 아니냐가 아무 상관없겠지만 그냥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쌀, 보리, 밀, 수수, 잡곡 등 우리가 아는 모든 곡류(cereal)는 외떡잎 식물인데, 메밀만 쌍떡잎 식물로 분류상 '아곡류(pseudocereal)'라고 한답니다. 그냥 잡학입니다.
이 메밀로 만든 음식이 한국의 냉면, 메밀국수, 메밀묵, 그리고 일본의 소바말고도 중국, 내몽고, 네팔 등에도 있다고 하는데 아직 먹어본 적은 없습니다. 유럽에도 나라마다 음식들이 있는데 역시 먹어볼 기회가 없었습니다. 먹어본 거라고는 프랑스의 메밀로 만든 크레프같은 음식으로 갈레트(Galette)라는 겁니다. 이태리에 메밀로 만든 피쪼케리(pizzoccheri)라는 파스타가 있다는데 먹어보진 못했고, 사진으로 보니 역시 짧게 잘라놓은게 역시 메밀반죽은 어렵구나, 므흣 하고 넘어갔습니다. 이거나 다른 메밀음식 여행하다 드셔보신 분 덧글 주세요~ 아래 사진은 갈레트하고 피쪼케리, 위키에서 퍼온 겁니다.


이 메밀을 생산량을 보면 러시아와 중국이 연간 백만톤 수준에서 일이위를 다투고 있습니다. 일본은 연간 3만톤 정도인데 이게 국내 소비량의 20퍼센트가 안된다고 합니다. 역산해보면 소비량이 15만톤정도이고, 약 12만톤 정도를 수입한다는 얘긴데, 미국도 있고 러시아도 조금 있지만 대부분이 중국산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 생산량은 위키의 통계에 따르면 연간 약 3천톤 정도라고 합니다.
자, 여기서 소박한 의문 몇가지가 듭니다. 연간 백만톤씩 생산하는 러시아 중국은 메밀로 뭘해서 먹나? 프랑스 폴란드도 10만톤 이상 생산하더군요. 그런 나라들 음식도 궁금합니다. 그러나 가장 궁금한건, 역시 우선 우리나라는 연간 소비량은 몇톤이고, 수입량은 몇톤이나 되나?
삼천톤이면 삼백만킬로그램입니다. 국민 일인당 연간 60그램에 해당합니다. 국산 메밀로는 일년에 한그릇도 못만드는 양입니다. 나머지는 수입산일텐데 아마도 전문점이 아닌 식당의 메밀국수나 냉면의 메밀 함량이 엄청 떨어져서 일본만큼 수입량이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일본은 아예 규정으로 메밀함량이 30퍼센트 이상이라야 '소바'라는 명칭을 사용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수퍼에서 파는 건면의 경우이고 보통 식당에서 파는 소바는 함량이 최소 50퍼센트 이상입니다.
아무튼 인구비례로 보자면 우리가 일본만큼 메밀을 먹는다면 연간 6만톤 정도는 소비해야 한다는 주먹구구가 나옵니다. 그런데 맛있는 소바를 먹는 일본의 예를 봐도 알듯이 메밀이 수입산이라 맛이 없는게 아닙니다. 좋은 품종을 사서, 보관과 유통을 잘하고, 도정을 신선하게 하면 얼마든지 맛있게 먹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제일 중요한 것은 제가 늘 주장하듯이 소비자의 입맛입니다. 소비자가 좋은 걸 알고 찾으면 장사하여 돈버는 사람은 언제나 요구에 맞춥니다. 우리도 일본처럼 수입을 한 메밀이라도 반죽에 섞는 함량을 높이고, 맛있게 만들어서 맛있는 메밀이 다시 부흥하는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말 잘 마무리하시고 즐거운 한 주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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